또 다른 슬픈 병영 에피소드

By | 2011-07-17

그러고보니 난 다행스럽게도 군생활을 하면서 그리 많이 얻어맞은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난 절대로 줄빠따를 내 아래로 내려보내지 않았었고 그걸 아래애들도 알았기 때문에 이 녀석들은 지혜롭게도 웬만하면 알아서 기었다. 내가 아래애들을 때리지 않는데 아래애들이 더 아래애들을 때린다는건 말이 안되었다. 만약 그랬다면 때린놈은 진짜 나에게 얻어맞을 명분을 제공하는 셈이니 감히 내 이후로는 누구도 맞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 부대에 처음 배치받았을 당시 거의 미친놈같은 왕고가 수개월 후 제대한 이후로는 구타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문제는 사병이 아니라 우리랑 몇 살 차이 안나던 소대장과 보좌관이었다. 수요일 전투체육의 날에 우리는 의외로 네트를 쳐놓고 배구만 했는데 (젠장 축구나 족구는 안하고 말이다) 다들 수요일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직접 경험해보니 그럴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양쪽으로 편을 갈라 경기를 해서 진팀은 무조건 소대장에게 곡괭이 자루로 빠따질을 당하는 조건이 내걸려있었다. 수요일 오후만 되면 부대원중 절반은 무조건 맞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현실 때문에 순찰병들은 누구나 수요일 오후엔 말뚝 근무를 원했지만 나 같은 행정병은 도망갈 곳도 없어 매번 정처없이 끌려가 빠따질을 당했다.  뭐 죽어라고 맞는건 아니어서 매번 참을만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맞는다는 사실 자체는 싫었기에 수요일 오후의 배구경기는 양편이 한치의 양보가 없었고 헌병대 답게 장신의 선수들이 많아 처음 편을 가르는 고참들간의 가위바위보가 시작될땐 곳곳에서 장탄식이 이어졌다.

내가 모시던 인사계는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고고한 결벽증 환자였다. 그는 삼청교육대 조교출신이었는데 그런 그 답게 때리지 않으면서 사람에게 극도의 고통을 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일가견이 있었다. 난 이 부대에 들어와 비로소 손목단련이라는 얼차려를 인사계를 통해 경험했는데 솔직히 난 대가리를 박는것 보다 (물론 도구를 이용해 박는거 빼고) 손목단련이 더 싫었다. 손목단련이란 간편하게 말하자면 엎드려 뻗쳐의 일종인데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는것이 아니라 손등으로 짚는것이 특징이었다. 안해본 분들은 한번 상상해보시라 손등으로 짚으려면 손바닥으로 할때 손가락이 바깥쪽을 향해있던 것이 반대로 안쪽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걸 정말 10분 이상 하고 있으면 팔 전체가 달달달 떨리는데 오래하고 나면 한동안 펜을 잡거나 타자를 치거나 식판을 닦기 어려울 만큼 팔전체의 맥아리가 완전히 빠져버리게 된다. 인사계가 행정병을 때릴때는 항상 두꺼운 쇠자를 가지고 손등을 (그것도 뼈있는 부분을) 20대 정도 때렸다. 묵묵히 빠따는 맞을 수 있어도 손등과 뼈에 전해지는 말초적인 고통은 참아내기 어려워 관등성명을 연호하면서도 손가락을 오무릴수 밖에 없었다. 뭐 그마저도 짬빱이 들어차자 거의 즐겁게 맞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는데 옆방의 보좌관은 좀 정도가 심했었다.

인사계가 인체의 조화를 헤아려서 상하지 않을만큼만 가격한데 반해 보좌관 이 친구는 성격자체가 좀 무식한 면이 있어서 자칫 때리다가 스스로 열폭할까봐 항상 걱정이 좀 될 지경이었다. 물론 보좌관도 자신이 때리는 부위가 거의 정해져있었다. 바로 쪼인트다. 조인트를 걷어차이는건 군바리에게 일상적인 일이긴 하나 우리 보좌관은 좀 집요했다. 조인트는 어쩌다 한번 얻어맞아야 견딜 수 있는 부위다. 내 생각에 보좌관은 자기 스스로는 슬기롭게 애들을 때린다고 그러는 모양이지만 당하는 사람은 그게 아니었다. 난 20년이 지난 지금도 오른쪽 다리에 그때 생긴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보좌관은 자신의 오른쪽 전투화로 상대방 오른쪽 조인트에 크로스 스파이크를 먹였는데 이 빈도가 하도 빈번해서 여름에 반바지를 입고 부대원들이 서있으면 마치 모두 같은 유전자를 가진 친척같이 오른쪽 조인트가 멍들어있었다.  뭐 다들 아시겠지만 피멍이 심하게들면 딱지가 앉는데 그 위를 다시 가격하면 드디어 상처가 터지면서 본격적으로 피가 흐른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날 거길 또 맞게되면 결국 상처가 터지고 터져 곪게 되는데 곪은 상처를 다시한번 가격당하면 그 고통엔 소리도 내지 못한다. 내 오른쪽 다리는 항상 고름이 흘렀었다.

어느날 막 순찰병으로 단독근무를 나서게 된 O일병이 정문에서 기습적으로 나타난 사단장 사모님의 차를 알아보지 못하고 정차시키는 대형사고를 일으켰다. (보통 정문 순찰병들은 사단을 출입하는 수백대의 주요 차량 번호를 모조리 외우고 있다가 그 해당차량일 경우엔 세우지 않고 통과시킨다 : 편집자주)  그 소식을 들은 보좌관이 O일병이 근무를 마치고 촥~촥~ 소리를 내며 걸어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미친듯이 달려나갔다. 나 역시 순간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고 뒤쫓아 나갔는데 그 순간 부대 마당에서 ‘퍽’하는 소리와 함께 O일병의 관등성명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아 미친새끼~ 결국 애 하나 잡았구나’

내무반 창문으로 목격한 애들에 의하면 마치 문전앞으로 흘러나온 볼을 달려들면서 중거리슛을 하듯 보좌관이 달려오면서 O일병의 오른쪽 조인트를 정통으로 걷어찬 것이었다. 다행히 O일병은 쓰러지지는 않았는데 그 댓가로 보좌관의 후속타가 연신 얼굴위로 날아들고 있는 중이었다.  난 다른부대에서도 보인다는 핑계로 과감하게 뒤에서 보좌관을 잡아뜯어 말렸고 뒤이어 뛰어나온 교육계 고참에게 발광하는 보좌관을 넘기고 서있는 O일병의 오른쪽 바지를 위로 잽싸게 올렸다.

“제길~ 빌어먹을~  야~이 미련한 병신새끼야 이건 피했어야지 그걸 그대로 받아내고 있는 미련곰탱이가 어딨냐”

거의 뼈까지 드러날 정도로 참혹했다. 거의 매일 그걸 맞아본 나로서는 그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지는것 같아 그 상처를 보고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친구의 근무복을 잽싸게 갈아입히고 두명이 부축해서 의무대로 올라갔다. 군의관은 같은 대위였지만 우리 보좌관보다 짬밥이 많은 사내였다. 그 참혹한 상처를 보더니 그 역시 한번 몸을 부르르 떨더니 첫 마디를 욕으로 시작했다

“아~ 그 새끼 애들 때릴줄도 모르는 새끼가 결국 사람잡네. 내가 가서 얘기해야겠고만”

군의관에게 내 다리의 상처도 보여줬더니 조인트가 아무렇지도 않은것 같지만 잘못해서 뼈가 상하고 감염되면 군대같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는 다리하나 잘라내는건 십상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점잖은 군의관 양반이 결국 다음날 점심시간에 위관식당에서 그에 대해 얘기를 했고 그 이후로 보좌관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버릇을 없애려 노력했다.  그 사건이 지난 얼마 후 O일병이 양지바른 곳 한켠에서 쭈그려 담배를 피우고있길래 내가 가서 오른쪽 다리를 까보니 맞은 자리에 구멍이 뽕~ 뚫려있었다. 마치 분화구처럼 말이다. (봉와직염을 여러번 봤었는데 고름을 다 파내고 소독을 잘해나가면 상처가 마르고 분화구가 생긴다. 그리고 몇개월이 지나면 그 구멍이 새로운 살로 메워진다 ㅎㅎ 신기해라~: 필자주)

제대후에도 그 (정신적)상처가 치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취직해서 알게되었다. 기억은 안나는데 신입시절 누군가가 내 잘못을 지적하면서 장난으로 조인트를 까려고 자신의 오른발을 들었는데 내가 펄쩍놀라 피하면서 과하게 어마어마한 신경질적인 반응을 냈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내 행동에 더 놀라게 되었는데 나는 그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어 그 자리를 도망치듯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지금도 누군가가 내 조인트를 까려고 한다면 나는 살기위해 그 자식의 턱뼈를 날려버릴 주먹을 나도 모르게 날릴지도 모르겠다. ~ 안좋은 기억은 무서운 것이여~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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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또 다른 슬픈 병영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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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이 너무 잘되서 불판 오징어마냥 읽는 내내 얼굴이 말려들어갔습니다. ㅎ

    demitrio님 필력이 부러울 따름이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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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상상이 너무 잘되신다는건 경험을 약간이라도 해보셨다는 얘긴데요…. -.-
      ^^ 답글 감사드립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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