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영이의 동생인 종신이는 운동신경이 좋았다.  우리들보다 3년정도 어렸지만 끼워줄만 했다.  종영이의 형인 종기형은 나보다 네살이 많았고 우리형과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나에게도 고등학교 선배였다.   이렇게 종영이네 3형제를 포함해서 나랑 성훈이, 쌍목이, 재영이, 그리고 그때그때 게스트로 종기형의 친구나 종신이의 친구, 그리고 태식이나 동희 등 우리들의 동네친구들까지 끼어서 언제나 편을 갈라 야구를 했다.

천재지변이 없는한 우리는 주말에 항상 모여서 야구를 했다.  아마 고등학교시절전체와 재수시절, 그리고 대학초반까지 이 야구리그가 이어진것 같다.  역시 대학에들 들어가자 다들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우리만의 리그도 사라졌다.
나 역시 첫사랑에 대한 댓가를 야구로 지불해야 했다.  여자친구를 데리고 야구장엘 갔다가 타자가 땅볼을 치고 1루로 내달리자 여자친구는 3루베이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으로 가도 되냐고 물어왔다.  그 순간 난 약간 아득한 느낌이 들었고 야구의 재미를 여자친구에게 가르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게 됨을 깨닫게 되었다.   이날 나온 희생플라이는 내가 도저히 설명해도 이해시킬 수 없는 룰이었다.

난 평생 여자친구를 사귀고 결혼을 하면서 여자를 좋아하게 되는 두가지 필수요소가 있었는데 첫번째가 스포츠고 두번째가 음악이었다. 즉, 운동을 잘하거나 좋아하는 여자, 음악을 잘하거나 좋아하는 여자가 거의 무조건 기준점이었다.  그러나 첫번째 조건은 정말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통감해서 별로 적용해본적도 없고 두번째조건만이 지금의 와이프까지도 커버하는 기준이었다.

우리들이 거의 5년에 걸쳐 야구를 했던 곳은 두군데 였다.  첫번째 장소는 성산대교 인터체인지 였다.  아무생각없이 지나다니면 인식을 못했겠지만 성산대교 인터체인지는 매우 복잡한데 그 사이사이에 잔디밭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았다.  우리는 우연히 그중에서 야구장으로 쓰일만한 다이아몬드 꼴의 인터체인지 사이의 잔디밭을 찾아냈다.

파울라인도 따로 그릴필요 없이 완벽한 야구장 형태였다.  약간 걸어가야 한다는 것과 구장바로 바깥은 아주 위험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 완벽했다.  아~ 화장실과 가게같은게 전혀 없다는 것도 단점이긴 했구나.  우리는 여기서 한 1-2년 정도 경기를 했다.  아무래도 위의 세가지 단점들이 계속 부각이 되면서 또다른 구장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두번째 구장은 동네 학교운동장이었다.  지금도 있는 망원초등학교였는데 크지는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우리들의 주 무대는 바로 여기였다.  우리는 알루미늄 방망이와 테니스공으로 경기를 헸다.  일반 야구공은 너무 위험했다.  예전 중딩시절 일반 야구공으로 야구를 할적엔 너무 유리창을 자주 깨고 지나가는 사람도 많이 맞아서 부작용이 만만찮았다.
내가 야구 특기생도 아닌데 어머니는 내가 야구를 한다고 걱정을 할 정도였다.

어쨋든 이미 우리는 중딩시절부터 야구를 해왔으므로 모든것에 대단히 능숙했다.  엄청나게 손발이 잘맞았고 모두가 투수요 모두가 포수이고 모두가 내야수이기도 했다.  항상 5-6명씩 편을 갈라했기 때문에 3루는 없었다.  베이스 2개에, 포수가 없을때도 있는 그런 야구경기였다.

모두들 고딩있었지만 다들 거의 완숙기의 기량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거의 모든 공을 마음껏 쳐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테니스공이 가진 단점이 투수의 구속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어느정도 시일이 지나자 타격이 투수력을 완전히 압도했다.  홈런도 너무 많이 나왔다.  나만 해도 한게임에서 타격컨디션이 좋을땐 3연타석 홈런을 치기도 했다.

이때문에 경기는 거의 외야에서 공을 주우러 다니는 육상경기에 불과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 타고투저 현상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기자기한 맛이 사라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때가 고2때쯤 이었으리라…
우리는 계속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타격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투스트라익만으로 아웃되게 하는방법등 다양했지만 야구 본연의 맛을 해칠 우려가 있는 방법은 결국 채택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 놀랄만한 아이디어가 나와 막바로 채택이 되었다.  모두 반대로 타석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  왼손잡이인 재영이를 제외하고 모두 왼쪽 타석에서 타격을 하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와우~  첨엔 거의 전타자를 삼진아웃 시킬 수 있었다.  양팀의 투수들은 거의 퍼펙트 게임을 펼쳐갈 수 있었다.  시일이 지나자 사람에 따라 적응 정도가 달랐지만 슬슬 때려내기들 시작했다.

종영이 같은 경우는 왼쪽에서 타격을 할때는 그립을 당연히 왼손이 위로 올라가게 잡아야 함에도 불구, 그걸 끝까지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지금도 오른손으로 타격할때와 마찬가지의 그립을 사용했다.   그래도 시일이 지나자 그 타격마저도 먹혀들기 시작했다.
플라이볼 보다는 땅볼이 많이 나왔는데 이때문에 내야수들의 기술 역시 늘게되어서 아무리 만루라도 땅볼한방이면 홈과1루에서 리버스 더블플레이를 완성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았다.

테니스 공에 완전 적응한 투수들의 발전도 눈이 부셨다.  종영이는 테니스 공으로도 변화구를 던졌는데 과장해서 말하자면 거의 탁구공야구를 하던 중딩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고3때가 되자 제약사항은 없어졌다.  즉, 왼손타격기술 역시 오른손과 거의 동일한 수준이 되었고 투수들 역시 좋아져서  언제나 박빙의 게임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와함께 반대타석에 들어서는 제한도 풀렸다.
난 그래도 거의 왼손타석에 들어섰다.  우리가 그때그때 초청하는 게스트들은 우리 기량에 모두들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특히 성균관대 아마추어 야구부였던 종기형은 양팀선수 전원이 스위치 타자라는 사실에 질려버리고 말았었다.  그리고 우리의 현란한 기량에 연신 삼진만 당할 뿐이었다.  나는 우리팀 투수였다.  언제나 난 언더핸드로 던졌고 직구인줄 알고 던졌던 싱커에 애들이 항상 속았다.

종기형은 딱 생긴게 김봉연을 닮아서 우리는 모두 김봉연이란 별명으로 불렀다.  종기형이 모두 범타로 물러난 그 다음주 경기에서 형이 같은 야구반 친구를 데리고왔다.  그 야구반 친구 역시 우리들의 야구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역시 양팀선수 전원이 양쪽 모두에서 능숙하게 타격을 하는 것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지나가는 아저씨나 운동하러온 다른 사람들도 10여명의 야구귀신들이 펼치는 내야수비나 외야 중계 플레이, 도루저지, 밀어치는 진루타,  주자있을때 반대편 타석 들어서기 등등의 고급 야구를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우리의 야구는 그렇게 거의 5년간 매주말 운영이 되어 왔다.
아마 수백경기를 한것 같다.  그후로도 난 그때익힌 기술로 거의 10년간 야구경기에서 스위치 타자를 유지할 수 있었다. 

종신이는 우리가 군대를 갖다올무렵 거의 성인이 되어 우리를 몇배로 능가하기 시작했다. 그녀석은 결국 그걸로 체육학과에 진학했다.

Facebook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