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아버지는 경리장교였다. 난 어려서 ‘경리’라는 말이 뭘 뜻하는지 몰랐다. 어쨋든 군복을 입었으면 다 같은 군인이라 생각했기에 단어의 의미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쩌다 한번씩 나에게 아주 진귀한 선물을 가져다 주곤 했는데 거의 스케치북 만큼이나 큰 종이뭉치였다. 맨 처음 그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을때 난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난 그 때 이미 한글을 읽고 쓸줄 알았고 그때까지 수년간이나 낙서 등을 해왔던 터라 내 낙서나 그림이 그려질 ‘대상체’에 대해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우리집 골목의 거친 시멘트 벽이나 약간 더 잘 사는집의 빨간 벽돌, 조그맣고 맨질맨질한 조약돌, 신문지, 거칠고 조직이 성긴 짙은 회색의 휴지, 마당화단을 둘러싸고 있는 타일, 반투명하고 볼록볼록하게 세로로 된 유리, 단단하고 붉은 빛을 띠는 흙바닥, 두꺼운 달력의 뒷면, 모조지 같이 얇은 매일 한장씩 떼어내는 어른 손바닥 만한 일력, 16절 갱지, 메리야쓰 상자, 형의 공책… 도대체 내가 모르는 소재란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난 그 소재에 따라 적절한 재료로 그림을 그려내는데 (때로는 그리고 달아나야 했지만)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던 나였기에 충격은 매우 컸다.
아버지가 가져다 준 종이는 대략 5백장은 되는것 같았다. 크기는 스케치북 만했고 신기하게도 종이 양쪽에 빼곡히 구멍이 뚫려있었으며 낱장이 아니라 그 수백장이 모두 연결되어 있었고 절취선이 있었다. 종이 앞면은 새하얀 백색이었고 뒷면엔 노트같이 줄이 쳐져있었다. 난 새하얀 앞면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으로 쓸어내리니 마치 왁스를 발라놓은듯 내 손이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와~아~~’ 정말 이건 보물이 아닐 수 없었다. 난 이걸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두고 그림을 그릴때마다 한 장씩 뜯어서 사용했다. 사실 종이가 아까워 그림을 선뜻 그리지도 못했다.
그 시기의 나는 한창 전투기와 총, 칼, 군함, 탱크를 좋아할 때였고 돈만 있다면 프라모델을 사러가는 나이였다. 난 그 종이에 탱크와 비행기를 그리고 싶었지만 그 욕망을 계속 참아내고 있었다. 어느날 나는 중학생이던 형에게 샤프를 하나 물려받게 되었는데 무려 0.5mm짜리 펜탈샤프였다. 그리고 곧 영감을 받아 최고의 샤프와 최고의 종이를 제대로 이용할만한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른바 본부그리기 놀이는 그 때 시작되었다.
커다란 건물의 단면도를 그리는 놀이였는데 요즘같이 추운 겨울날 밖에 나가서 놀기 귀찮을때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그걸 그리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그러지는 못했지만 어쨋든 자주 그렸고 한 장을 모두 그려내는데 대략 5-6시간이 걸린 것 같다. 그림은 사실 그렇게 거창할 것이 없었다. 그냥 네모 반듯한 사각형을 그리고 그 안에 층을 나누어 각 층마다 내가 생각하는 시설들을 배치하고 방을 만들고 또 만들고 하는 것이었다. 핵심은 깨알같이 그린다는 것. 한개 층의 높이는 성인 손가락 한마디 정도였으니 대략 매번 그릴때마다 20층짜리 건물 (주로 지하 20층이었다. 왜냐하면 군사시설이기 때문에…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하나씩을 그렸나보다. 맨 처음엔 사람들이 자는 공간인 방을 위주로 그리다가 아버지 부대에 놀러갔던 경험을 살려 내무반과 행정반, 사병식당, 장교식당, 강당, 정비소, 이발소, 의무대 뭐 이런식으로 종류가 늘어나기 시작, 초등학교 졸업에 즈음해서는 그 생각이 하도 발전해서 본부내에서 잠수함과 전투정, 헬리콥터 등이 출발할 수 있게끔 배치하였고 방어적 목적의 기관포좌나 공격목적의 미사일 발사관까지 갖춘 미래형 종합 전투본부를 혼자 히히덕 거리면서 섬세하게 그리곤 했던 것인데, 스스로는 성시스틴 성당의 벽화를 몇 년간 누워서 그린 미켈란젤로와 비교하곤 했었다. 그는 천정을 보면서 누워서 그렸고 난 배를 깔고 누운것만 빼면 연수도 비슷하다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그림들을 그려내는 몇 년동안 나에겐 많은 변화가 찾아온 것 같다. 일단 내 글씨가 아주 작아졌다. 그리고 어느 한군데 집중력이 생겼고, 항상 구조와 동선을 생각했기에 사람이 분석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오른쪽 세번째 손가락이 유난히 움푹 패이게 되었는데 이건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 책을 읽는 것도 아닌데 샤프와 지우개, 종이 한장으로 5-6시간을 조용히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그림들은 언제나 혼자 그리곤 했었기에 가족들을 제외하면 친구들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우리집에 놀러온 한 녀석에게 우연히 그림이 발각되었는데 그 녀석은 그림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그 그림을 자기가 가지면 안되나고 조르기 시작했다. 하긴 처음보는 사람이라면 그럴만 했다. 그 한장에 거의 200명쯤의 사람을 그려넣고 100개 이상의 방과 이런저런 정교한 구조물들이 촘촘하게 그려져 있으니 그러는 것도 당현했다. 나야 뭐 그려놓은 것들도 많아서 그깟 한장 정도야 간단히 줘버렸는데 주위의 몇 몇 친구들이 어디선가 종이를 구해와서 자기집에서 본부를 같이 그리면 안되겠냐고 간곡히 요청하는 바람에 그때부터 ‘그림원정’이 시작된 것 같다. 놀러간 집의 엄마들은 우리를 정말 이상하게 생각했다. 둘이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고 말도없이 오줌도 참으며 5-6시간을 가만히 있으니 궁금할만도 했겠지.
난 내 그림을 잘된 그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내 그림을 보고 언제나 감탄했다. 아니 혀를 내둘렀다. 그 정교함과 그 뒤에 숨겨진 엄청난 노가다에 질려버린 것이었는데 난 남들이 엄두가 나지 않아 시작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내가 먼저 시작한다면 항상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란 교훈을 그때 얻었다. 나의 본부 그림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중단되었지만 그 성향은 다른쪽으로 이어져 고등학교때는 노트필기 부문에서 거의 절정에 달한 내공(?)을 지니게 되었다. 지난번 노트대마왕에서 공개한 나의 역사노트가 그 중 대표작인 것 같다. 그러나 노트필기와는 별개로 난 재수를 하게 되었고 학원에서 나를 처음본 여학생이 내 노트를 빌리러 집요하게 따라다녔을 정도였다. (그 여학생의 노트를 보고 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의 표현을 그대로 기억해내자면 백만년 공부해봤자 대학 못갈 노트였다고나 할까?)
재수까지 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이거였다. ‘젠장~ 노트필기 아무리 잘하면 뭐하나? 점수는 그 정성만큼 안나오는데’ 대학에 들어오면서는 내 노트필기에 대한 전통 역시 내가 스스로 무시해버린것 같다. 노트란걸 거의 안쓰다 시피했었으니 말이다.
내 어릴적 그 그림들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난 생각한다. 난 정말 커다란 그림이나 지도를 손으로 그리고 싶어했고 그 욕망은 어떤 매개체가 등장하면 발현할 것으로 믿는다. 그 때 다시금 주위사람들이 놀랄만한 그런 큰 그림들을 다시 그려보고 싶다~ 요즘 어린 시절의 그 그림들이 자꾸 다시 생각나는것 보니 그게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역시 기본기는 아날로그에서 우선 이루어진 다음 디지털을 만나 확장되는게 아닐까 싶네요
아들 녀석에게 아이패드 보다는 연필을 쥐어주고 싶은 마음이..
그래서인지, 문구 대마왕 잘 듣고 있습니다^^
네 중요한건 아날로그적 감성과 사고인것 같아요 ^^
아마도 아이에게 그 재능이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
그렇게되면 참 뿌듯할거 같은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