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순수하게 기획과 관련된 이야기 입니다. 강의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시간이 없다’란 얘기입니다. 저는 몇몇 분들과 그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었죠.  원색적으로 얘기하자면 전 그분들에게 ‘과연 당신들이 체계적으로 일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그분들은 체계성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란 질문을 다시 제게 던지기도 했습니다.  오늘 얘기는 그 체계성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겠군요 ^^

Scene #1. 기획할 시간이 없다

강의를 마치고나서 가방을 챙기는데 몇 명이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어난다. 나 역시 웃으며 손으로는 노트북을 챙기면서 왜 그렇게 고개를 흔드냐고 물었다. 일행중 한 명이 이렇게 대답했다. “말씀하신건 대체적으로 공감이 되는데 현실에선 너무 시간이 촉박해 기획이고 뭐고 없이 당장 문서를 작성하러 달려들지 않으면 안되요. 늘 그런식이다 보니 저희도 늘 그 자리에 머무는 것 같아요”

난 주어진 시간의 80%를 기획에 투자하고 나머지 20%의 시간에 작성하라고 강의때마다 주장한다. 그리고 기획의 중반부에 반드시 전체의 핵심을 구조화하고 그에 대한 논리전개도를 한 장으로 단순하게 손으로 그려보라고도 한다. 한마디로 난 기획단계에서 이런저런 주문을 참 많이도 한다. 그들은 아무래도 내가 주문한 그 모든걸 해내기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해서 내가 얘기하는 것은 현실보다 이상향에 가깝다고 생각해 그렇게 한숨을 쉬거나 고개를 흔들면서 자조적으로 웃는것 같다.
내 강의에 참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간에 쫓긴다고 증언한다. 단 사흘, 아니 반나절이나 하루만에 결과물을 요구하는 상사와 고객들 때문에 내가 요구하는 ‘고품격(?) 기획’은 사실상 어렵다고 말이다.  맞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결과물을 요구하는 상사들을 나도 오랜 시간 저주해왔다. 그리고 나 또한 비상식적인 시간과 자원을 주면서 부하직원들의 등을 떠미는 일을 하게 되면서 그러한 악순환은 계속 반복된다는 슬픈 사실도 깨달았다.  나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웃었던 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난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작성하는 보고서나 프레젠테이션이 언제나 100% 새로운 것은 아니란 사실이었다. 완전히 같은 일도 없지만 완전히 다른 일도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비슷한 패턴의 반복이었다. 따라서 내가 이번에 쓴 보고서의 내용은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전 보고서들의 내용을 절반쯤은 수정하거나 짜깁기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대응은 언제나 비효율적인 것이었고 언제나 임기응변의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어쨋든 난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확고하게 인지했고 이에 대해 한번쯤 대대적인 반격을 하리라 다짐하게 되었다.

  • 완전히 새로운걸 만드는 일은 사실 드물다
  • 내 작업은 비효율 투성이다

우리는 지루한 참호전을 벌이는 참호속에 웅크린 병사와도 같다. (마치 서부전선 이상없다에 나오는 그런 병사들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를 밀어붙이고 밀리고는 하지만 몇 개월째 전선은 고착화되어 있는 그런 상태말이다. 우린 여간해선 참호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거기서 나와 새로운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지쳐있는 상태다. 아마 누가 뭐라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 상태가 계속 이어지길 바랄지도 모르지만 그걸 바라지 않는다면 어쩔수 없이 추가적인 힘을 내서 새로운 것을 도모해야 한다.

Scene #2. 비효율의 예

난 16년의 직장생활을 통해 다양한 산업을 경험했지만 나의 직무는 ‘IT기획’이었다.  내가 만든 문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시스템 구성도였는데 이는 실제 컴퓨팅장비의 배치도였으므로 대단히 세심하게 그려져야했다. 임무는 항상 순식간에 내 앞에 떨어졌고 난 언제나 많은 시간을 들여서 번번히 컴퓨터와 네트워크와 관련된 그림을 그때 그때 찾아나섰다.   그림을 찾는데 정말 많은 시간이 들었다. 반나절동안 그림만 찾으러 다닐때도 있었다. 난 뒤늦게 그것이 비효율적임을 자각했고 뭔가 시스템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가장 많이 쓰는 시스템 도면을 위한 아이콘들을 선정하여 모아놓고 항상 그것들을 사용한다면 시간은 반의 반으로 단축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최초 그 생각을 하고 난 뒤 난 거의 1년 정도를 시간이 있을 때마다 여기저기를 뒤지면서 다닌 것 같다. 그리고는 지금은 HP에 합병된 3Com에서 그걸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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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을 전후해서 찾아낸 3Com 네트워크 아이콘들. 좌측으로 15도 기울어져 있어 입체적인 도면을 그려내기 아주 적합한 그림들이었다

며칠동안 내가 사용하기 좋게 모든 아이콘들을 변환하여 하나하나의 화일로 저장을 해두고 보니 거의 3백여개의 아이콘이 모여있었고 그 뒤로는 이전보다 3배는 빠르게 더 고품질의 시스템 구성도를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나에게 기획에서의 진보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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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인 국민대 캠퍼스 네트워크 구성도중 정보시스템 배치도. 이때부터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고 조화롭게 시스템구성도를 빨리 그려내게 되었다.

이후 난 내 스스로 템플릿화 하여 효율을 낼 수 있는 부분을 찾아 계속 최적화를 시도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도형 10여개를 미리 만들어두고 대부분의 도형을 새로 그리기 보다는 미리 만들어둔 것을 복사해서 사용하는 방법으로도 난 시간을 정말 많이 단축할 수 있었다.

한번은 현대자동차 기획실을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가 있었는데 강의전 일상적인 보고서 몇 개를 받아서 검토한 적이 있었다. 거기엔 아무래도 전 세계의 경쟁자들의 로고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보면서 난 예전 나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로고들은 짐작컨데 보고서를 쓰기 위해 급히 구글에서 퍼나른 것으로 추정되었다. 모든 로고들은 총천연색 그대로였고 배경이 제거되지 않은 로고도 있어서 여러개가 장표에 배치되고나자 들쭉날쭉해 보였다.

아무래도 현대자동차 기획실이니 전세계 자동차메이커의 로고들은 앞으로도 꾸준히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수십명의 기획실 멤버들은 그때그때 구글을 찾아 로고를 찾는데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이건 기획실 전체로본다면 시간낭비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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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률적으로 흰색으로 (일일히) 바꾼 로고들, 고객사 리스트 등 서로 평등하게 나열하고자 할때 이렇게 단색조로 처리하면 튀지 않아 매우 좋다.

나라면 주니어 기획자에게 임무를 주어 모든 로고를 ai나 eps 포맷으로 찾아내고 그것을 일러스트레이터 등을 이용하여 (잠시 그 소프트웨어는 빌려쓰라고 해야겠지) 각각 흰색, 검은색, 가로형태, 세로형태 등 4가지 형태로 배경색없는 PNG형태의 독립적인 화일로 만들어 놓으라고 지시하고 그것이 완료되면 모든 기획실에 공유하게끔 할 것이다.  – 로고를 모두 흰색, 검은색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들을 나열할때 더 보기 좋다. 그대로 놓으면 로고가 화려한 곳에 더 시선이 가기 때문이다-

난 기획자를 보고서를 만드는 ‘요리사’에 비유하곤 하는데, 좋은 요리사는 자신의 주방을 최적화하여 잘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방 어디에 어떤 도구가 들어있는지 기억하고 있으며 필요할때 보지 않고도 그것들을 빠르게 꺼내들 수 있다. 또한 자신들의 요리에 자주 쓰이는 양념들은 평소에 잘 준비하고 있다.

위에서는 로고나 아이콘, 도형 준비를 예로 들어 비효율의 예를 설명하였지만 기획의 모든 부분에 적용된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Scene #3. SAD의 교훈

난 경영정보학(MIS :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을 전공했는데 전공필수 과목으로 SAD(시스템분석 및 설계 : System Analysis & Design)를 배우면서 시스템적 사고에 대한 정의가 매우 인상 깊었다. 우리가 만들게 될 System은 Planned Response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닥치면(Stimulus :자극) 그에 반응하는 시스템은 그것을 계획된 범위내에서 처리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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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된 반응’은 기획의 수준을 결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요소라 할 수 있다. 계획된 반응은 ‘예상할 수 있는 자극’에서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자극에 반사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예상할만한 일에 번번히 반사적으로 수동적으로 일회성으로 응답한다는 것은 기획자로선 수치스러운 일이다.

scene #1, #2, #3를 통해 한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이렇다. 기획은 ‘시스템’으로 기획자들은 예상할 수 있는 자극을 정리하여 그에 대한 Planned Response를 만드는 것이 장기적인 임무이다.
어떤 보안솔루션 회사의 기획자 예를 들어보자. 그는 프리세일즈와 제안서 쓰는데 지친 기획자였다. 난 이렇게 질문했다. “어떤 회사들이 이 솔루션을 살 수 있나요?” (시스템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자극들이 들어오나요?”란 질문과 같다) 그 기획자는 금방 대답을 못하였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그 답을 둘로 나눌 수 있다. 그 솔루션을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로 말이다.  사실 그것을 더 나누면 더 세분화될 수 있다. 우리의 솔루션을 가진자와 경쟁솔루션을 가진자, 가져야 하는데 가지지 못한자, 가지고 싶은데 가지지 못한자, 가질 생각이 없는자… 그 각각에 대해 우리의 대응은 달라져야 하고 이런 대응논리는 평소 연구되고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들 각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Benefit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생각해보면 scene #1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는 항상 비슷한 일을 반복하면서 바쁘게 지낸다. 우리회사가 팔아야 할 상품 품목이 단 몇개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대응논리는 비교적 쉽게 정리할 수 있고 우린 평시에 이것을 시간을 두고 정리해놓아야 하며 향후엔 계획적인 반응으로 내놓아야 한다. 특수한 직업이 아니라면 난 대부분의 기획자들은 비슷한 일을 평상시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약간씩의 변화가 생길뿐이라 여기고 있다. 만약 이에 동의하는 기획자라면 자신만의 시스템 구축을 시작하라. 나에게 들어오는 자극을 분류해보고 그에 따른 대응논리를 만들어두라. 시스템의 강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이 축적되면 더욱 강력해 진다는 것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반응은 ‘계획된 반응’에 근거해 나온 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하라.  서울 시내의 어느 유명한 돌솥밥집은 점심시간이 가까워오면 대기시간이 발생하지 않게 미리 돌솥밥을 앉힌다. 원래는 15분 이상을 기다려야 하지만 경험치에 의한 계획된 반응 덕택에 우리는 기다리지 않고 돌솥밥을 주문후 5분내에 받아볼 수 있으며 그 음식점은 선순환이 이루어져 매출이 오르게된다.
이것을 단순히 ‘매뉴얼화’라 생각하는것은 곤란하다. 내가 이렇게 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쳇바퀴 돌듯 매번 소모적인 기획을 줄이고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여 더 창의적인 생각에 집중할 수 있기 위해서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하나 하겠다. 당신은 당신 직업과 직무에 맞는 지식베이스를 구축해놓았는가 ?

(‘No’라고 대답했는데 자신이 10년차 이상의 기획자라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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