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 양남동에서 망원동으로 이사가던 날은 아직도 생각난다. 1975년 이른 봄이었던가? 정말 안개가 자욱해서 수십미터 앞도 안보였다. 날씨는 아직도 차가워서 손이 시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는 대단히 흥분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양남동 우리집은 한옥같은 구조여서 이런 저런것이 불편했다. 툇마루에 걸터앉는 것과 마당이 가운데 있는것은 참 좋았다. 그러나 화장실도 바깥에 따로 떨어져있고 부엌도 따로 떨어져있어 밥상을 일일히 마당을 통해 날라야 했으며 위에서 볼때 ㄱ자로 된 집의 양쪽 끝방은 신혼부부와 해태제과 공장에 다니는 누나들에게 세를 주어서 우리는 방 하나에 네 식구가 모여 살아야 했다. 당연히 부엌과 거실은 공유했고 욕실은 따로 없었다. 그때문에 겨울엔 항상 물을 데워서 부엌안에서 문을 닫고 머리를 감아야 했다. 어린 나는 그렇게 집안에 사람이 많은 것이 좋았다.

해태에 다니는 누나들만 해도 기억은 안나지만 그 방에 4명은 같이 사는것 같았다. 1970년대 초였으니 얼마나 먹고살기 어려웠을 시절이었을까. 아마 그 누나들은 갓 스물이 안된 나이들이었을 것이고 아마 모두 타지에서 서울로 올라와 공장근처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내 기억에도 낮에 그 누나들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 아마도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왔을텐데 내가 잠들기 전 쯤이면 날이 훈훈할땐 누나들이 마당 수도가에서 씻으면서 웃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고 나면 누나들은 이미 출근하고 없는 상태였다.  누나들은 부엌옆의 문간방에서 살았다.

우리집 안방과 거실을 공유하는 건너편에 살던 신혼부부는 엄청 친절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남편은 매일 일찍 출근해 늦게 들어오는 것을 반복하는 터라 난 솔직히 얼굴이나 목소리 뭐 하나 기억나는게 없다. 다만 그 집 세댁 아줌마(아줌마라고 하기도 뭐하지만)는 다섯살짜리 나에게 정말 다정했다. 5월의 봄볕은 아침나절 마루의 구석까지 들어왔다가 정오가 가까워올 수록 마루의 끄트머리 부분으로 물러갔는데 오전 집안일을 마치고 엄마와 새댁은 가끔 마루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난 따뜻한 볕이드는 나무 마루에 옆으로 누워 낮잠을 자곤했는데 엄마보다 새댁아줌마의 무릎에 눕는걸 더 좋아했다. 뭐랄까 엄마는 이젠 형식적으로 토닥거리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빨리 잠들지 않으면 뭐라하기 까지 했었는데 새댁아줌마는 정말 달랐다. 아기를 가지고 싶은 마음으로 언제나 충만했고 내가 나타나면 거의 피붙이같이 쓰다듬어주고 안아주고 하는 통에 나는 언제부터인가 엄마보다 그 새댁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토닥토닥과 등긁어주기, 머리 만져주기, 내 양말의 보푸라기 떼주기 따위를 진심으로 좋아서 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엄마랑 얘기를 하면서 손으로는 계속 그렇게 해주다보니 짧게 끝나지 않아 참 좋았다. 그때 내 눈치론 엄마도 내가 그쪽으로 붙어있는 것을 더 편해 하는것 같았다.  정말 그 때의 낮잠은 꿀맛이었다.

그 당시 집의 구조는 철대문 위로 계단과 장독대가 있었는데 그 장독대는 옆집과 맞닿아 있었다. 우리 집과 맞닿은 집은 승건이 형과 아마도 승룡이 형, 희정인가 하는 누나의 3남매와 그 부모, 조부모까지 같이 사는 일곱식구의 나름 대가족이었다. 우리집과 기본구조는 같았으나 형편은 우리보다 나았고 세를 주지 않고 단독으로 방 3개를 모두 나누어썼다. 승건이 형이 나보다는 10살은 많은것 같았으니 그 집 아줌마도 우리 엄마보다는 연배가 한 세대 위였다. 사실 여섯살의 난 거의 깡패였다.  가장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우리집 반찬이었다. 밥을 빼고는 손이 가는곳이 거의 없었다. 엄마는 고기국이나 찌게를 매일 해줄 형편은 못되었다. 난 그럴때면 내 스텐레스 밥공기와 숟가락을 들고 장독대를 넘어 승건이 형네로 갔다. 우리집과 그집의 식사시간은 거의 같아서 장독대에 올라가면 마루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그집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난 항상 장독대 위에서 그집 식구들에게 소리쳤다.
“나 거기 가도 돼?”
그럼 그집 식구들이 다들 오란다. 그집 반찬은 언제나 좋았다. 난 맨밥만 가져가서 그집에서 뚝딱 한그릇을 비우고 우리집으로 넘어오곤 했다. 엄마는 매번 민망해하셨지만 그 결과 엄마는 그 집과 친해졌고 그 집 식구들은 형과 나를 정말 귀여워했다.

스캔 10

형과 나. 1974년경. 양남동집 장독대에 올라가서

아버지는 내가 더 어렸을때 월남에 가셨다. 따라서 모든 집안의 운영은 엄마 혼자의 몫이었고 지금 기억해보면 대단히 고된 가사노동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월남에서 정기적으로 소포를 크게 붙여왔는데 어느날은 거기에서 히다찌 냉장고가 나왔다.  그게 우리집 첫 냉장고였고 다른 이웃집들이 냉장고를 가지게 된 시기보다 평균적으로 빨랐다.  난 무엇보다 여름에 얼음을 동동띄운 미수가루를 먹을수 있게 된 것을 축복으로 여겼다. 아버지가 보내오는 정기적인 소포는 궤짝같은 것에 포장되어 왔는데 커다란 책상만했다. 거기서 나온 물건들이 어린 나에게는 결정적이었다. 어느날 빙수기가 나왔고 어느날은 도시바 카세트 라디오와 아버지가 월남에서 녹음한 음성메시지,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사운드 오브 뮤직의 사운드트랙, 트리오 로스 판쵸스, 앤디 윌리엄스, 브러더스 포의 카세트 테잎들이 나왔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엄마가 주력으로 사용하는 파이렉스를 비롯한 그릇들 모두가 그 소포를 통해 나왔다. 씨레이션이나 깡통캔에 들어있는 오렌지 분말쥬스 같은 것고 기억난다. 사실 엄마는 그 물건들을 세운상가 같은곳에 내다 팔고 월세를 받고 하면서 생활비를 마련했고 빛을 갚아나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월남에서 돌아와 수년이 지날 무렵 엄마는 흥분된 표정으로 아직 유치원에 다니는 나와 국민학생인 형을 앉혀놓고 망원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음을 선포했다.

사실 그 선포는 적어도 나에겐 달갑지 않은 선포였다. 모든 골목친구들이 여기에 있고 난 우리집과 이웃집, 이웃들을 사랑했으며 많이 어렸지만 정들었던 양남동을 떠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삼촌집도 가까워서 걸어서 놀러다니기도 편하지 않은가. (한번은 엄마랑 아빠가 하도 말다툼을 심하게 벌여서 6살밖에 안된 어린 내가 보다못해 외삼촌집에가서 삼촌을 불러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엄마에겐 그 이사는 특별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수년간 묵묵히 벌인 자신과의 전쟁에서 드디어 성과를 이루어 낸 것이었으며 이제 월세를 주고 단칸방에서 4명이 살아야 했던 것에서 벗어나 한겨울에도 화장실을 가기위해 추운 방문을 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집에 가게된 것이었다. 그러니 엄마로서는 삶의 질이 한단계 격상된 것이었고 가난에서 벗어나게 된 의미있는 이사였으니 말이다.

이사때문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기에 우리는 배가 고팠었는데 거의 점심때가 가까워오도록 안개는 그대로였다. 엄마는 과감하게 평소에 잘 사주지 못하던 우유식빵을 사가지고 오라고 나에게 돈을 들려줬다. 와우~ 지금의 식빵과 비교를 하자면 그 우유식빵은 조금 달랐다. 일단 높이가 좀 낮았고 자르지 않은 식빵이어서 뜯어먹는 형태로 정말 고소하고 맛있었다. 비닐봉지마저 우윳빗으로 흰색이어서 정말 우유식빵 같았는데 우리 형제에겐 가장 좋은 먹거리로 취급되었다. (최상의 먹거리는 스마트였다)  그 식빵을 사준다는 엄마의 선언에 나는 바람같이 집을 나섰지만 처음 온 동네이고 안개가 잔뜩 껴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몰랐다.  아마 내 기억엔 왼쪽으로 간 것 같다.(사실 양쪽에 모두 가게가 있다)

내가 살던 양남동을 떠난 이 아침에 난 엄마가 우유식빵을 사줘서, 집 바로앞에 놀이터가 있는 것을 보고 이 동네에 마음을 붙이기로 결심한다. 그때가 1975년 봄이었다. 우리는 그 후로 1994년까지 망원동에서 살게된다. 햇수로 20년이었고 나에게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난 동네였으며 내가 정말 좋아하고 애착이 가는 동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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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 표시가 있는 바로 저 지점이 망원동 우리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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