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을 돌아봤을 때 스스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소프트유니브에서 류재훈 선생을 만나 그림 그리기를 배운것이었다. 사실 2개월 정도만 배우고 시간이 허락치 않아 더 이어나가지 못했지만 난 첫 한 달동안 그림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정리할 수 있었고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이 부끄러웠으며 내 그림을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게 된 것은 정말 큰 소득이었다. 적어도 난 앞으로는 영혼없이 그저 똑같이 그리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 큰 깨달음을 준 류재훈 선생에게 다시 감사드린다.
이제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가 그림이 필요한 순간에 대해 얘기해보자 (이렇게 감성없이 냉정해 지기는 참 싫지만) 내가 말하는 현실이란 ‘일’을 말하며 우리가 필요한 그림은 그 ‘일’에서 사용되는 보고서나 프레젠테이션에 사용되는 그림, 미팅이나 회의에서 화이트보드에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그림이 일인 경우는 제외하자) 남을 설득하기 위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그림은 이해력을 높이기 위해 텍스트를 대체해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림이 어떤 방식으로 그려지고 그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예를 들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1. 그림은 여러차례 그려진다

지난달 스타트업 여러팀과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며칠간 1:1로 코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얘기를 먼저 듣고 질문을 하고 아이디어에 대해 토의하면서 나는 노트를 펴놓고 순간적으로 머리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을 빠르게 옮겨 그리고, 적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들은 얘기를 내가 다시 정리해 주면서 그림들을 몇 개 보여주었는데 그들은 대번에 그 의미를 알아채고 ‘와우~ 바로이거에요. 굉장한데요 혹시 이 그림을 저희가 사용해도 될까요?’라면서 놀라워했다. (모든 경우에서 그림이 나온건 아니었다)

웨딩서비스와 스마트폰 앱을 개발하는 어떤 회사는 토론을 통해 대략적인 플롯(혹은 내러티브)을 다음과 같이 ‘3단 전개’로 합의했다. (이런 내러티브를 단순하게 잡아내는 작업도 진짜 중요하다)

➊ 혼자서 웨딩준비를 하기엔 너무 챙겨야 할 것이 많아 짜증나
➋ 그래서 모든걸 일임하려고 웨딩플래너를 고용하지만 여전히 따로 신경쓸 것이 많지
➌ 우리 서비스는 그 부분까지 일원화하려고 노력했어 이제 넌 정말 편해질거야

나는 저 텍스트들을 아래와 같이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번개같이 머리속을 스치는 아이디어를 잡아채 즉석에서 마구 휘갈겨 그린 그림이었다. 왼쪽 위 그림이 ➊에 해당한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복잡한 실타래가 연결된 모습이다. 왼쪽 아래는 ➋에 해당되며 오른쪽이 웨딩플래너, 왼쪽이 신부, 아래는 신랑이다. 웨딩플래너를 고용했어도 여전히 실타래가 많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오른쪽 그림은 ➌에 해당되는데 드디어 왼쪽의 신부가 실타래를 모두 오른쪽에 넘겨주고 해방된 모습이며 신랑이나 기타 긴밀하게 의사소통해야할 대상자를 같은 영역안으로 두고있는 모습이다.

Voila_Capture209
난 이 그림을 발전시켜 사업계획서나 제품소개서에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고 당연히 프레젠테이션에도 등장시켜야 한다고 했다. 청중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난 내 노트에 그려진 저 그림들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가라고 했다. 아마 그 이후에는 저 그림에 대해 내부토의를 거쳐 더 다듬었을테고(두번째 그림) 파워포인트나 키노트의 도형도구나 클립아트 등을 사용하여 저 모델을 새롭게 그려서(세번째 그림) 발표했을 것이다.

그림은 한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내 경험에 의하면 위의 케이스와 같이 적어도 두 세번 변형되며 마지막 그림은 대개 프레젠테이션 앱내에서 그려진다.

 

2. 중요한 그림은 머리속의 그림이다

정작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림의 주인공은 손이 아니라 머리이다. 그림이 예쁘게 그려지는 것은 우리의 목적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것은 저렇게 그리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머리에서 스쳐지나가는 것을 손이 반응하여 그리려면 아래와 같은 그림이 될 수 밖에 없다. 이것만으로도 커뮤니케이션은 충분히 가능하다. 시간이 없다면 저 사람같이 그려놓은 것들을 그냥 원으로 그려도 된다. 문제는 어떻게 저런 구도의 그림을 그려낼 생각을 하도록 머리를 훈련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아직도 대부분의 경우 그림을 즉석에서 그려낼 수가 없다. 내가 그려낸 것은 창조한 것이 아닌 경험과 약간의 응용력이 전부일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가장 효과적인 트레이닝은 스스로 많이 경험해 보고 남의 작품(?)을 감상해 보는 것이다.

작년 미술수업에서 사물에 시선을 고정하고 손을 보지 않고 천천히 그리는 실습이 있었는데 처음엔 대단히 어려웠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눈으로 관찰한 것을 그려야지 시선을 떼고 그리는 것은 내가 평소 그 사물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예측해서 그리는 것이라는 선생의 말은 강력하게 내 뒤통수를 때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설명한 (현실적) 그림은 머리가 본 것을 그대로 손이 그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Voila_Capture210

 

3. 손으로 잘 그려야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난 손으로 정성들여 잘 그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이다. 비주얼씽킹을 위한 멋진 도구들, 이를테면 온갖 종류의 전용펜, 스케치북 등은 실전에 임했을 때 수중에 없을 확률이 더 높다. 그 보다는 항상 업무에 쓰이는 펜과 노트가 더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기를 연습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손으로 뭔가를 그리거나 쓰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생각을 자극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손과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풀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바는 그리기를 연습하면서 목적을 넘어 자기만족과 순수예술 분야로 진입해버리는 것이다. 난 강의를 할때 우스개 소리로 문서를 작성해야지 이 색 저 색을 다양하게 써보면서 멋진 색상배합이나 그림찾기, 도형그리기 등으로 예술혼을 발휘해선 안된다고 이야기 해왔는데(그렇게 얘기하면 다들 웃는다) 그리기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여러분이 목표로 하는 비주얼씽킹이 청중을 더 쉽게 이해시키고 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비주얼 도구의 연습이 도에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나름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Tip : 그려놓은 모든 그림의 부속 하나하나를 텍스트로 치환해 보라.

 

Facebook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