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냉면의 추억 : 유천냉면

By | 201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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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여름, 난 가산동의 한진택배 물류센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곳이 LG홈쇼핑(현 GS홈쇼핑)의 물류센터였는데 난 IT기획자로서 물류부문을 담당하고 있어 아예 센터에 나가서 근접지원하기로 하고 거기에 장기간 나와있었다.  내 일은 입출고가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정보시스템을 계속 튜닝하고 개선하는 일이었다. 그러자면 센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했고 난 업무의 절반은 작업자들과 함께 입출고장과 로케이션에서 보냈다.

입출고 작업은 모두 육체노동이었고 날은 더웠으며 게다가 실내였다. 내 기억으로는 하루에 두번정도 출고하는데 오후 다섯시에 두번째 출고를 치열하게 마치고 나면 힘도 빠지고 허기가 몰려왔다. 홈쇼핑이 한창 물이 오른 98년경엔 물류센터는 거의 밤낮으로 돌아갔고 야근은 필수였다.

더운날 저녁, 지치고 땀나는데 좋은 저녁 메뉴는 ? 오~ 다행히 근처에 칡냉면집이 있었고 우린 그걸 자주 배달시켜 먹었다. IMF가 터지고 난지 반년이 지난 1998년의 여름 저녁식사로 난 칡냉면을 정말 많이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살얼음이 동동 떠있는 국물은 그렇게 더운 여름날에도 닭살이 돋게 할만큼 시원했고 매콤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은 더워서 입맛이 떨어진 여름엔 제격이었다.  아마 그 집이 유천칡냉면의 체인점인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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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차를 고치러 나섰다가 카센터가 꽉찬걸 보고 들어가지도 못한채 차를 돌려나왔는데 내친김에 밥이나 먹고 들어가야 겠다…라고 생각하곤 풍납동으로 달렸다. 정확히 네비게이션으로 풍납동의 유천칡냉면 본점을 찍었는데 지난번 내가 간 집과는 다른 집이었다.  아… 알고보니 풍납동엔 유천칡냉면집이 두 군데.. 좀 알아봐야겠지만 오늘 온 집이 본점인가 보다. 간판은 유천칡냉면이 아닌 유천냉면으로 되어 있다.

요즘은 음식을 사먹으면서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그저 음식이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기말이다. 예를들어 면은 너무 익히거나 설익지 말아야 하고 딸려나온 김치는 방금 한 것 처럼 하나도 안익었고, 육수는 미지근하게 식어있고…뭐 이런것 말이다. 워낙에 기본이 안되어 있는 음식점이 많다보니 기본만 제대로 갖추어도 ‘맛집’이 되는 세상이다.

칡냉면은 평양냉면같이 밍밍한 냉면이 아니다. 매운맛-단맛-신맛의 세가지가 조화를 이루어 매콤함을 내는 자극적인 냉면이다. 이 세가지 중 어느 하나가 과하게 되면 밸런스가 무너지게 되는데 맛집이라면 항상 이런 밸런스를 최적으로 유지해낸다. 유천냉면 본점은 딱 이 부분에 충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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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나오는 육수는 충분한 양이 제공되며 정갈하고 간도 잘되어 있다. 무우 무침의 간도 매우 적절하고 살얼음은 냉면을 섞고 중간정도 먹을때쯤이면 대부분 녹아내리도록 너무 얼어있지 않다.  면도 적당히 삶아져 쫄깃하고 양념장의 양, 고명, 삶은 계란, 오이채 등 모든게 나무랄데 없다.  자~ 이 정도면 벌써 별 3개 이상을 받아낼 준비는 된 셈이다. 맛은 단맛-신맛-매운맛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이다. 사실 근 10년 동안 (세상이 힘들어서 그런지) 음식은 계속 맵게 변해가는 중이다.

속이 아리도록 매운 음식들이 넘쳐난다. 난 솔직히 맵기만 한 그 맛이 뭐가 좋은건지 잘 모르겠다.  난 냉면이라는 음식을 6살때 어머니가 사주신 곰보냉면(항흥냉면)으로 스타트를 끊었고 사촌누나가 자주 사주던 명동면옥도 비빔냉면이었다. 망원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즐겨먹었던 시장표 냉면은 아직도 내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냉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시장통 냉면이 기본적으로는 매콤한 냉면의 부류에 속했다. 어린시절 신정동 시장골목에 있던 외삼촌댁에  놀러가면 밥을 차려주는 대신 시장에서 항상 냉면을 시켜주셨는데 그때 먹었던 냉면도 All-Time-Best에 끼워줄만한 맛이었다.

이런 역사 때문에 난 매콤한 냉면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그 시장통 냉면들도 신맛-단맛-매운맛의 밸런스가 정확히 유지되었었는데 유천냉면과 다른점이라면 맛의 세기, 즉 혀를 어느정도로 자극하느냐가 좀 다르다. 시장통냉면이 신맛-단맛-매운맛의 세기가 5-5-5 정도로 유지된다면 유천냉면은 좀 더 강해서 8-8-8정도 인것 같다. 즉, 매콤한 냉면류중에서는 가장 강한맛에 속하는데 내 개인적인 취향이기는 하나 이것이 조금 더 마일드해 진다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맛이 자극적이다보니 음식의 깊은 맛 보다는 표면적인 맛에 좌우되는 경향이 생기는 것 같아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운점에도 불구하고 유천냉면은 현존하는 매콤물냉면 부문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다.

시장통냉면과 분식집 냉면은 인스턴트 육수가 개발된 직후부터 그 명맥이 소멸된 느낌이다. 너무 싸고 쉽게 육수를 구할 수 있게 되다보니 너도나도 냉면을 메뉴에 넣을 수 있게 되었고 맛은 천편일률적으로 변해 육수나 양념장, 고명에 의한 차별화는 더이상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점은 냉면 마니아인 나로서는 통탄할 만한 일이다.

※ 혹시라도 현존하는 시장통 냉면의 숨은 강자를 아시는 분들께서는 꼭, 제보바란다. 그런 숨은집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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