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붕의 추억 ㅜㅜ

By | 201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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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떠올려보니 진정한 멘붕은 92년 이었던 것 같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김영삼의 오른팔이었다. 김영삼이 가택연금 상태였던 시대부터 그 집에 드나들었던 것 같다. 그집과 가까운 곳에 국회의장을 지내셨던 박관용 의원댁이 있었고 그 집 아들도 같은 동네 동갑내기 친구였다. 내 기억으론 70년대말 그분들은 몽땅 백수였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다보면 마주칠 수 있는 분들이었다. 걔네 아버지는 항상 내 자전거를 세우고는 시시콜콜한걸 물어보고 시비를 걸기도 하고 그랬다. 가끔은 포수글러브를 끼고 내 공을 받아주기도 하셨지.
중학교때는 드디어 뭔가 활동을 시작하셨던 것 같다. 갑자기 없던 운전기사가 나타난게 그 무렵이었으니까… 한번은 시간때가 맞아 역시 같은 중학교를 다니던 친구의 하교시간에 그 집 차를 얻어탔다. 근데 차는 집 반대 방향쪽으로 가고 있었다. “잠깐 상도동 좀 들렀다 간데이~” 걔네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에구 이런…그냥 버스타고 집에 갈걸….근데 뭐 그날은 좋은 경험이라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서 상도동 김영삼의 집에 다녀왔다고 하니 부모님이 살짝 놀라셨다.

어쨋든 그때는 아직도 짜장면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걔네 아부지는 민주산악회가 결성되면서 집엔 등산장구류와 손님이 늘어나기 시작한것 같다. 손님이 가득 모이면 친구가 우리집에 전화해서 나를 불렀다. 난 언제나 그 연락엔 잽싼 반응을 보였다. 끼니때가 되면 청요리가 가득이었는데 우리동네에서 가장 잘나가는 북경원, 안동관에서 짱깨형들이 철가방을 양손에 들고 2-3명이 한꺼번에 나타날 정도였다. 물론 우리 몫이 있었기에… 평소 구경할 수 없는 탕수육과 짜장면, 짬뽕을 배터지게 먹을 수 있는 기회였다. 게다가 안방에서 고스톱을 치는 손님들 (김덕룡 의원, 김동영 의원 같은 ㅋㅋㅋ) 이 동전을 바꿔오라고 가끔 심부름을 시켰는데 아따~ 그분들의 논리가 기가막혔다. 노름판의 심부름은 원래 그 삯을 많이 받는거라며 천원짜리를 손에 쥐어 주시기도 했으니까…
정치탄압이 걷히자 그 백수분들은 갑자기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걔네 아버지 얼굴을 동네에서 보기 힘들었다…. 정말 별별일이 다 일어났다. 광주에서의 그 무시무시한 일, 신군부의 집권과 함께 군인이던 우리 아버지는 군복을 벗었다. 난 걔네 아버지와 그 고스톱 멤버들이 민주투사라 어린시절 내내 믿었다.
노태우 정권이 저물어 갈 무렵 나는 대학생이었고 백골단에게 가끔 돌을 던지기도 하는 학생이었다. 드디어 정권이 바뀔 차례가 되어가고 있음을 누구나다 직감하고 있었다. 그 주인공은 3김씨중 누가 될것인가가 관건이었다. (김대중이 가장 앞서 있었다) 오…….. 그러던중 3당 합당 얘기가 정말 뻥~ 하고 터졌다. 내가 은근 친하던 김영삼이 노태우랑 합쳤다고 ? …. 자기를 가두었던 그 노태우하고 ?…에이…말이 안돼… 말이…..

갑자기 제일 신경 쓰이는 것은 친구네 아버지였다. 김영삼의 오른팔인데 사전에 같이 계획을 짜지 않았을까 ?…. 그쪽에 기별을 해보니 다행히 그런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른팔이면서도 그 사실을 언론을 통해 아셨단다…그리곤 부리나케 당사로 쫓아들어갔단다. 아마도 그 성질에 뭐라도 집어던졌으리라… 후에 전해들었던 얘기론 친구네 아버지는 동료들의 집요한 설득으로 결국 설복당하셨단다.

그리고는??? 난 정말 멘붕…….. 이건 뭐 속된말로 몸도주고 돈도 빼앗긴 기분이랄까 ? 내가 지금까지 10년이상 믿어오던 것이 순식간에 뒤바뀌면 멘붕이 안오고 배길수가 없다. 친구 아버지는 5선의원까지 하셨고 정무장관, 내무부장관까지 지내셨다. 사실 차기 대권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지만 97년 뇌졸증으로 쓰러지신것이 결정적 타격이 되어 사실상 은퇴하시게 된다. 그렇게 정부의 요직을 거치면서도 예전 성격대로 직선적이고 하여 여당내 야당의원같은 모습을 유지하셨다는게 그나마 내겐 위안거리… 사실 그 3당 합당 이후로는 그 친구하고는 연락이 끊겼다.

휴우…그때 그 3당 합당한 당이 민자당…나중엔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지지 않았던가…..그 굳건한 토대를 이룬 사람들이 내 어린 시절내내 민주투사라고 여기던 분들이었으니….후우….

아마 92년 대선이 패배감과 배신감이 한데 어우러진 최고의 멘붕이었을 듯 싶다. 그 다음 멘붕은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키고도 패배했던 87년…87년은 내가 재수하던 때라 그 패배감은 어린 나에겐 좀 적었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난 친구 아버지들은 그냥 친구 아버지들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작년초 나이를 쳐먹을만치 쳐먹은 친구자식이 결혼을 한댄다. 이노무자식은 결혼을 하려면 그냥 곱게 할것이지 함을 들이는데도 와달란다. 맙소사…함이 들어간 날(2011.1.15)의 공식적인 기온은 영하 18도였다…무려!!! 그런데 밖에서 이 나이에 실랑이를 벌일걸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일주일 후의 결혼식도 내가 사회를 보기로 했다. 이날이 되어서야 그 놈한테 주례선생이 누군지 물어봤다.  ‘응~ 전 국회의장 박관용 의원이야’

아고고… 또 칭구 아버지네… 결혼식 당일 무대옆에서 칭구 아버지를 만났다. 먼저 쾌활하게 나에게 말을 먼저 거셨다.

“잘 부탁하네~”

“네 아버님~”

아버님이란 호칭이 나오자 대뜸 표정이 변하셨다. “저 OO친굽니다. 저도 망원동에 살았죠. 같은 성당에도 다니고요. 댁에도 뻔질나게 드나들었습니다”

“아~ 그래? 허허허 ”

그때서야 OO아버지는 표정이 풀리고 말투도 자식새끼 친구에게 하듯 풀어지셨다. 이 나이 먹고 결혼식 사회보기는 십수년만이어서 난 그만 성혼선언문을 건너뛰고 예물을 교환하라고 선언해버렸다.  맨앞에 있던 그 친구 여동생이 즉각적으로 어찌나 깔깔거리고 웃던지 난 즉시 내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후우~ 한나랑 인사들과의 정말 뿌리깊은 유대관계…..난 그냥 그 분들을 칭구 아버님으로만 부른다…

자아…또 다른 얘기 한토막…한창 멋모르고 돌을 던지던 1988년, 내가 재수하고 입학한 해이고 올림픽이 열린 해였으며, 13대 총선이 있었던 해였다. 대학입학 직후 난 자유에 취해있었다. 그리고 밤엔 마실줄 모르는 술에 항상 취해있었다. 대학신입생으로 봄을 맞고 있을때 한승이에게 전화가 왔다. 녀석은 고3때 같은반으로 우리반 반장이었다. 전화 내용인 즉슨 ‘아버지가 국회의원에 출마하시니 도와달라’는 얘기였다.  나에게는 당연히 그걸 도와줄만한 명분이 충분했다. 한승이 아버지는 유명한 인권 변호사인 강신옥 변호사였고 박정희 독재정권시절 뜻을 굽히지 않고 약자를 도왔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얍삽한 민정당 의원을 상대로 그것도 우리 지역구에서 (마포 갑) 출마하신다니 돕지 않을수 없었다.

경성고등학교 17회 졸업생 대다수가 여기에 동참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김영삼네 당으로 출마했기 때문에 더 반가왔다. 1988년 4-5월 나와 칭구들은 홍대앞에 선거사무소를 두고 정말 엄청나게 열심히 뛰어다녔고 민정당 후보로 나온 박주천이를 물리치고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다. 정말 내일같이 기뻐했다. 왜 아니었겠는가 ? 그 당시 대학생이라면 노태우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양재물 마시는게 도움이 되었다면 기꺼이 마셨을 애들이 부지기수였다. 뭐랄까 내 지역구를 깨끗하게 청소한 느낌? 전통적으로 마포 갑 지역구는 거의 서민층이 다닥다닥 붙어사는 야당색이 짙은 곳이었다. 이전 총선에서 당선된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의 유명앵커 봉두완씨는 망원동 물난리 시찰을 나왔다가 격분한 주민들이 올려붙인 귀싸대기 세례를 받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게 지금은 강용석 같은 쓰레기가 배출되는 지역구가 되었다니. 현재는 정청래라서 다행이다만)

거봐라…난 초등학교때부터 대학교입학해서까지 주욱 민주투사들을 성원했다…. 허 허 허…그런데 뭐 1990년 3당 야합때는 칭구 아버지뿐만 아니라 강신옥 의원까지 모두 합세 = 초딩때부터 내가 지원했던 모든 정치인이 3당 야합에 참여…. 허 허 허 …. 멘붕*100

진짜 마지막 얘기 한토막…

내 칭구…그러니까 강신옥 의원의 아들 한승이… 내가 옆에서 본얘기만 하겠다. 이 친구 학교에서는 학력고사 전국수석 후보로 보고있었다. 총 7차례의 모의고사에서 한승이는 3-4회 정도 전국수석을 이미 차지했었다. 이 녀석이 가고자하는데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서울대 법대… 강신옥 의원은 서울대 법대에서 사시와 행시를 동시에 패스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게 결국 한승이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나보다… 학력고사를 물말아 먹게된다. 전국수석은 커녕 서울대 법대도 들어가기 힘들게 되었다.  한승이는 고대 법대를 가겠다고 집에 말한거 같은데 아버지는 고작 고대 법대에 가겠다는 아들을 쓰레기 취급한거 같다. 한승이 표정이 너무 어두웠고 서울 법대에 가기 위해 재수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여졌다.  그 친구 결국 아버지와 딜을 한다..고대 법대에 가는대신 최대한 빨리 사법고시를 패스한다…로…

난 국민대를 다녔다…망원동이 집이었던 나는 집에 가기 위한 코스가 3가지 정도 있었다. 1코스는 학교앞 2번 종점에서 2번을 타고 종점까지 가는것…복되게도 집에서 학교까지 한방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니… 2코스는 522을 타고 북악터널을 넘어 신촌에서 버스를 갈아타는것…시간상으로는 이게 빨리간다…1-2코스의 버스가 끊기면 최후의 방법 3코스는 종암동 고대앞까지 버스를 타고가서 망원동 가는 7-1 막차를 잡아타는것. 7-1막차는 11:30분 정도까지 있었다. 학교앞 송백에서 신나게 술을 먹다가 어느날 간신히 3코스를 선택하여 7-1 막차를 잡아탔다. 그리고 거기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어? 한승아~~~”

“너 술한잔 했구나”

“응 했지…”

기가막혔던 것은 2학년인 그의 행색. 고3때와 다를바가 없었다. 아무렇게나 걸친 옷….공사장에서 벽돌 나르는 아저씨들이나 간신히 질 법한 엄청난 무게의 가방… 그 녀석 …이미 사법고시에 매달려있었다… 후우~~ 내가 술이 확 깨더라. 녀석이 불쌍해서 차마 술취한 모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그는 약속대로 재학중 사법고시를 패스한다.  1991년 33회 사법고시이니 4학년때 한거다.

녀석은 서울지법 판사를 거쳐 기획조정심의관, 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울산지법 부장판사를 거쳐 작년 서울고법판사가 되었는데….휴우~ 짜식….그해 8월 그러니까 2011년 8월말…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들어갔다….응 그러니까 MB한테로… 으히구..내 팔자야~ (오해는 마시라 대학초반 이후 지금까지 한승이하고는 연락도 안했었고 친하지도 않으니)

내곁에 남아있는 독야청청한 재야세력은 누가있단 말이냐….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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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멘붕의 추억 ㅜㅜ

  1. Playing

    안녕하세요 ~ 오랫만에 댓글을 쓰네요 이전 글들도 잘 보고 있었습니다^^
    생생함이 느껴지는 글 잘 봤습니다
    저랑은 띠 동갑 이상으로 차이가 나시네요. 지방 공대 중심 사립대를 다녔습니다. 첫 친해지기 여행(OT)에서 함께 있던 선배님이 사회계열 운동 모임을 알리려고 오셨습니다. 첫 인상은 좀 누추해보이고 왠지 술만 많이 먹고 비관적일 꺼 같았습니다

    나름 치열해야 학점을 겨우 방어할수 있는 공대생이라서 모임은 커녕 비싼 학비를 그나마 절감할 수 있는 장학금을 위해 그냥저냥 두꺼운 원서에 파묻혀갔습니다. 그러다가 ‘대우’ 사원분들이 어떤 쇠뭉치를 휘두르는 세력에게 피를 그야말로 철철 흘리며 저항하는 대규모 사진을 지하철에서 보게 되었죠. 그 사진에 선배랑 비슷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완전 충격적을 받았습니다. (흡사 광주나 제주 민주화 항쟁 때나 혹은 독립운동을 탄압받는 듯한 생생히 비참한 사진이었음)

    지금 생각해보면 정당히 일한 것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분을 위해서 뛰어다니는 선배가 철없는 후배의 모습에 뭘 기대하는지 나름 정성껏 잘해주셨는 걸 알겠네요

    이리 생각을 하게되니 이전 세대인 교수님이나 80년대 중후반 다니셨던 선배들의 자기비판이 얼마나 대단한 일임이 느껴지네요. “우리는 공부 안하고 사회운동만 하다가 정신없이 사회로 나왔지 뭐냐… 너희들은 기회되면 열심히 하렴”

    아무튼 알면 알수록 믿을 수 없는 감쳐진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에 이 글을 보게 되니 또 시야가 넓어진 거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추신)
    고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출마 지지 선언하는 영상에서 “‘지역주의’에 묻어가는 ‘기회주의자’가 대접받으면 우리 정치는 한 발도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되니 힘들더라도 기본을 지켜야 국민이 결국 의지할 만한 정치를 할수 있는 겁니다”라는 의견이 더더욱 절실한 상황이 도래했네요. 과연 이전의 정치인처럼 현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의 선택이 기대됩니다.
    언급하신 옛 이야기처럼 멘붕으로 이어질 지 아니면 기본을 지킬 수 있을 지 지켜보겠습니다!

    Reply
    1. demitrio Post author

      벌써 제가 블로그를 시작한 지도 7년째네요.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거창하게 써내려가려고 마음먹고 단단히 준비해서 쓴거보다 그저 있었던 평범한 일상이나 스토리를 담백하게 풀어내는 글들이 더 잘읽히는것 같아요.
      수영장에 다니면서 거기에서 띠동갑 형님을 저도 만났는데 그 분은 딱 저를 막내동생 보듯하세요. ㅎㅎ 다들 나름대로의 치열한 세상을 헤쳐나와 오늘날 이정도에 이르게되었겠죠 ~ 나이어린 후배나 자식들은 웬지 모자라보여서 괜히 초조해지고…”우리때는~”하면서 얘기 시작하게 되고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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