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oke

By | 2012-02-03

Smoke

담배와 관련된 지난 24년의 이야기

아주 화창한 1988년 5월초 어느날 오후 나는 잔뜩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내 인생의 첫 담배가 될 은하수 한 갸치를 한성이한테 막 건네받고 있었다. 불과  3개월전 까지만 해도 난 숨막혔던 재수생에 불과했다. 나의 고교시절은 자유가 박탈된 암흑기 바로 그 자체였다. 학교는 감옥같아서 높은 벽돌담 위로 쇠꼬챙이 살이 촘촘이 박혀있었던 데다가 그것도 모자라 그 위로 다시 원형 철조망이 감겨있는, 대탈주 같은 영화에서나 봄직한 전형적인 포로수용소였다. 나는 태생적으로 갇혀있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고 그 결과로 실력있는 담치기꾼이 되었다. 아마 그 시절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난 주저없이 ‘담을 넘는 것’이라 대답했을 것이다.

실제로 난 필요하다면 언제든 학교의 담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그에 대해서는 에피소드도 많거니와 깡패같은 선생들에게 어찌나 얻어 맞았는지 허벅지에 피가 마를날이 없었다.  우리학교 선생들은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이었지만 꽤나 쿨한 구석도 있었다. 범죄현장에서 검거되지 않으면 눈감아 주는 풍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때문에 곳곳에서 학생들이 도망가고 선생이 뒤쫓는 풍경이 벌어졌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우리 형은 내가 같은 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아들자 학교에서 주력이 가장 빠른 선생이 누구인지부터 가르쳐줬다. 예를 들어 뽀빠이 같은 선생은 주력이라는게 보잘것 없으니 멱살이 잡히더라도 뿌리치고 도망가면 절대 못 쫓아온 다는 것, 허주헌 선생은 샌님같은 영어 선생의 모습이긴 하나 정보사 장교 출신에 쓰레빠를 끌고 백미터를 13초에 뛰는 준족이니 각별히 주의할 것 등이었다. 어쨋든 난 여러번 담넘는 풍경을 교도주임 선생에게 목격당했고 그때마다  그의 눈앞에서 유유히 담을 넘어 도망쳤었다. 붙잡히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는 항상 고3 건물 옆의 수돗가 으슥한 곳으로 가서 애들을 패는데 어찌나 인정머리가 없는지 별명조차 ‘씹빠빠’였다.  난 언제나 자유를 갈망했고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마침내 그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학한지 3개월도 안되어 지금 먼지를 쓰고 앉아있는 문무대에 입소해 다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내 인생 최초의 담배를 건네받았다고 해서 나를 탓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난 그날 공수훈련을 받고 막타오를 타면서 왜 군인들이 주저없이 뛰어내리게 되는지 너무 잘 이해가 되었다. 막타오 타워는 3-4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우리는 10여명씩 조를 짜서 순서대로 피티체조를 해가면서 꼭대기층까지 올라가야 했다. 아마 최초로 선자리에서 그 꼭대기까지 냉큼 뛰어가라면 1분도 안걸릴 코스였지만 어쨋든 우리는 오전내내 입에서 단내를 풍겨가며 한 층 한 층 올라야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너무 힘든 나머지 빨랑 올라가서 떨어져 죽어버리는게 더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구르는 애들도 빨리 올라가서 뛰어내리길 갈망했다. 막타오 줄이 끝나는 수십미터 밖에선 훈련을 끝낸 놈들이 안도의 한숨을 담배연기와 함께 내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딱 그 상황에서 한성이가 담배를 자연스레 나에게 내밀었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하나를 뽑아들어 피우게 되었다. 오후엔 과감하게 PX까지 가서 은하수 한갑을 50원을 주고 샀다.

저녁 식판을 짬통에 버리고 내무반 막사 뒤에서 불량한 자세로 짝다리를 짚고 서서 담배를 피우는데 처음이다 보니 콜록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지나가던 영준이가 예의 그 활짝웃는 얼굴로 나를 놀렸다.

“아저씨 담배 처음 피시나 봐요~?”

어이구 쪽팔려라. 다 큰 사내놈이 담배하나 제대로 피우지 못하는게 스스로는 어찌나 쪽팔렸던지 난 연신 담배를 피워물어봤지만 초식은 흉내낼 수 있으되 구결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재엽이가 한 말이 담배를 피우는데 있어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거부하지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없던 것 같이 그냥 같이 호흡하라고”

그의 말이 맞았다. 5월이 가기전에 난 그럴 수 있었다. 1988년, 그 시기는 정말 흡연자들에겐 천국과 같았다. 첫 여름방학때 상주의 덕구네 집에 놀러갈때 우리는 시외버스 뒤켠에서 함께 담배를 피웠다. 사당 지하철역 구내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워 물었었고 을지로 3가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길 기다리며 플랫폼에서 친구와 담배를 꺼내물었다. 심지어는 이대입구 대흥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며 뒤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도 있었는데  이럴때면 어둠속에서 누군가 “거 담배 좀 끕시다”라고 소리치곤 했었다. 난 동네 단골극장에서 그럴 기회를 잡게 되었다. 특전 유보트를 동시상영하고 있었는데 평일 마지막회였다. 우습게도 남은 관객은 나 한 명, 극장 주인 아줌마와 촬영기사는 날 보고 영화를 볼것인지 물어왔다. 내가 안 본다면 그대로 극장문을 닫고 퇴근하려고 말이다. 난 본다고 했고 거기에  아줌마한테 혼자니까 담배 피우면서 보고싶다고 했다. 사장님은 쿨 하게 오케이~! 난 내 인생 최초로 극장내에서 콜라를 얼른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특전 유보트를 감상했다.

내 담배가 가장 환영받은 기억도 있었다. 처음 담배를 배운지 2년후 여름 한달 내내 비가내리는 환경에서 나는 4주 신교대 훈련을 묵묵히 받고있었다. 그날은 각개전투날로 200정도 고지를 점령하는 일이었는데 어찌나 비가 많이 내리는지 판쵸우의를 입고 고지를 향해 엎드려 쏴 자세를 하고있으면 위에서 흘러내려오는 흙탕물이 내 목덜미쪽으로 밀려들어와 바지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갔다. 훈련을 마치고 총기를 반납한 후 우리는 흙이 너무 많이 묻어있어 아예 폭우가 쏟아지는 바깥 수돗가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는데 팬티내에 퇴적된 흙이 가득했다. (어쩐지 똥싼 빤스처럼 무겁더라니)

난 그런 날씨를 대비해 아침부터 미리 구해놓은 비닐 봉지 두개로 절대 물기가 스며들지 않게 단단히 담배갑을 포장했고 각개전투장에서 비에 젖지 않은 담배는 내것이 유일했다. 새 담배였는데도 난 두 가치밖에 못피웠고 나머지 18가치는 무수히 쏟아지는 비와 감사의 말과 함께 판쵸우의 속에서 나온 흙묻은 손들 안으로 사라졌다.

나에게 있어 흡연은 아이디어의 창구였다. 최근까지도 난 하늘로 사라져가는 연기를 바라보며 생각들을 정리해서 책상앞으로 돌아오곤 했다. 물론 초기엔 어머니가 정말 싫어했고 담배를 끊게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셨다. 어느날 텔리비젼에서 불가리아의 장수마을이 나왔는데 거기서 나온 100살이 넘은 할배는 친구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리포터가 담배 피우는데 건강이 괜찮으시냐고 묻자 그 할배는 ‘난 속썩어가면서 담배피우는게 아니라 언제나 기분좋게 핀다. 건강은 마인드로부터 시작하는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어찌나 멋있던지… 그 후론 난 담배와 건강을 연결시켜 나를 설득시키려는 자들에게 언제나 그 얘길 해줬다. 금연에 대해선 아무도 날 설득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흔해빠진 여친의 금연권고 같은 것도 말이다. 오히려 내가 같이 피우자고 설득을 했으니 …

90년대 들어 세상은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이 친구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워 물었던 사당역안에서 미소를 띠며 다가온 의무경찰 두 명이 나에게 경례를 하고 딱지를 득템해 가는 순간 나는 이제 흡연 세상이 탄압받고 있다는걸 뼈저리게 느꼈다.  난생 처음 미국에 갔던 93년엔 우리나라보다 엄격한 그네들의 환경에 놀랐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달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또한 놀랐다. 그 즈음 우리집은 지금의 역삼동으로 이사했는데 다행히도 여기 역시 예전 동네와 마찬가지로 슬리퍼를 끌고갈 수 있는 영화관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영화관에 스모크라는 영화가 걸렸고 애연가로서 난 당연히 원래 하던 것 처럼 토요일 마지막타임을 잡아 혼자 영화를 보러갔다.

이건 거의 담배를 피우며 봐야하는 영화였다.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오랜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담배를 피워물고 한 모금 빨아당기는 장면이 있었는데 어찌나 연기가 생생했던지 나도 모르게 손이 담배가 들어있는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영화가 끝난후 극장 문을 닫으려고 지켜서있는 아저씨에게 이 영화는 좀 특수하니 마지막회에는 관객도 모두 담배를 피우며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된다면 관객도 좋아할 것이고 나 역시 몇 번 더 보러올것 같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아저씨의 표정은 싸늘하다못해 한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욕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제 시대는 변했다.

오늘날은 흡연하는 친구들이 현격하게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밖에서 피운다 하더라도 장소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런 즈음에 찾아간 그리스는 흡사 20여년전의 한국 같았다. 아네테 공항 대합실에서, 버스를 모는 운전기사가, 택시 기사는 말할 것도 없고 남녀노소 누구나 담배를 피웠고 흡연에 대해 참으로 관대해 그리스가 과연 EU에 속한 나라가 맞는지 신타그마 광장에서 짝다리를 짚고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천대받기 전까지 난 그리스에서의 흡연생활을 즐겼다.

난 지난 24년간 행복한 흡연자였고 나의 흡연이 남에게 피해가 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다. 흡연구역에서 피우고 있다 하더라도 근처를 지나는 비흡연자가 꺼달라고 요구하면 바로 끌 정도로 말이다. 내 흡연은 시간과 날씨를 거의 가리지 않았었다. 뉴욕에서 돌아올때 앵커리지를 경유한다는 얘기를 듣고 난 오랜 시간을 흡연의 기대속에 보냈고 알래스카의 멋진 밤공기를 흡입하며 공항 한귀퉁이 옥상에 마련된 흡연구역에 감사했다. 그런가하면 밖의 날씨가 영하 20도가 넘는다 하더라도 주기적으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밖으로 유영을 나가는 우주인같이 두꺼운 옷을 2-3시간마다 끼워입고 건물밖으로 나서기도 했다.  엘지홈쇼핑(현 GS홈쇼핑)은 나의 두 번째 직장이었는데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는 공기청정기의 시연 모델로도 동료들과 함께 나서 한 보루의 담배를 그들과 그자리에서 다 피워 없애야 하는 임무도 부여받았고 말이다. 흡연은 나에게 나쁜추억을 남기지 않았고 불가리아의 할아버지가 말한대로 난 행복해하면서 피우려고 노력했다.

앞서 말했 듯 흡연은 사색의 시간이자 같은 흡연 동료들간 의사소통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열거하지도 못할만큼 많은 추억을 가져다준 소재였다. 난 이제 지난 24년을 함께 한 나의 동료를 떠나보내려고 한다. 이 글도 그 친구에 대한 이별의 글이다.  점차 고립되어 가는 현실과 흡연자들의 감소,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서 말이다. 참 어려울테지만 그로인해 얻어지는 행복이 예전만 못하기에 결국 나는 성공할 것이다. 아직도 내 주위에 남아있는 흡연 친구들이여 너무 섭섭해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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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thoughts on “Smoke

  1. 늙은여우

    담배는 끊는게 아니라죠?
    저는 올해로 4년동안 담배를 참고 있는 중입니다 ^^
    꼭 성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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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아 저도 참아보는걸로 바꿀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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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도령

    하여튼 기억력 끝내줘요. 참고로 막타오가 아니라 막타워(Mock Tower)다. 내가 문무대에 대해 기억하는 건 (물론 타러 가는 건 그지같았지만) 막타워가 생각보다 시시했다는 거.. ‘통일’하려다 결국 ‘충성’으로 바뀐 경례구호 해프닝 정도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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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난 당구에 미친 우리들 대부분이 ‘아줌마 났어요’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네말대로)막타워에서 뛰어내린것도 기억한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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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edamin

    담배를 더 오래 피기 위해 잠깐 쉰다고 생각하세요^^*
    저도 본의 아니게 지금 4개월째 금연 중입니다.
    꼭 성공하시길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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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아~ ^^ 성공중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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