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포인트 블루스 출간 덕분인지 지난 1년간 프레젠테이션 강의의뢰가 늘어나 어느 순간부터는 감당이 되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강의를 힘겨워 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강의의뢰가 들어오면 난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보내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참석자들이 직접 작성한 슬라이드거나 적어도 그 업계에서 통용되는 그들의 현실에 가까운 슬라이드를 말이다.  난 그들이 처한 현실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내용으로 교안을 수정하곤 했는데 그 작업에 항상 오랜 시간을 할애했고 그 때문에 같은 내용으로 두번 강의한 적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이러한 강의 준비방식은 스스로를 힘들게 했지만 그로부터 배우는 것이 더 많았다. 오늘 다루게 될 ‘번호’에 대한 이야기도 그 과정에서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한 소재중 하나다. 정작 내 스스로는 습관처럼 굳어져 중요하다는 인식이 없었는데 다른 수 십명의 슬라이드를 검토하고 나자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고 그 중요성도 새롭게 다가왔다.

 

 

이해를 돕기는 커녕 교란하고있다

 

우리는 문서를 작성할 때 번호를 너무 쉽게, 거리낌없이 꺼내든다. 게다가 번호에 대한 강박증까지 가지고 있다. 예를들어 우리는 목차를 작성할때 습관적으로 번호를 붙인다. 서론-본론-결론의 3부구조에 각각 1.서론, 2.본론, 3.결론과 같이 번호를 붙인다음(이걸 Level 1이라 부르자) 그 하부구조를 걱정하기 시작하면서 번호에 대한 강박증도 시작된다.  서론에 포함된 3개의 장(챕터)인 배경, 목적, 추진범위에 1.1 배경, 1.2 목적, 1.3 추진범위와 같이 번호를 붙이고나면(이걸 Level 2라 부르자) 그 하부구조에 대해서도 번호를 붙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1.2.1 업계동향’와 같이 말이다.(Level 3) 걱정은 계속된다. 개별 슬라이드의 타이틀은 Level 2 수준에서 붙어야 할까 아니면 Level 3가 맞을까. 청중의 편의를 위해 슬라이드 마스터에 문서제목과 현재 보고있는 내용이 속한 Level 1,2 타이틀을 페이지 상단에 작게 달아주는것이 낫지 않을까. 어느 대기업의 컨설팅 결과발표 슬라이드에서 나는 Level 4 수준까지 내려간 번호를 목격한 적도 있었다. (‘2.1.1.2 물류부문 이슈’와 같이 말이다)

문서내의 또 다른 번호체계를 살펴보자. 우린 특징이나 목표, 문제점 등 무언가를 결정적으로 열거할 일이 생길때면 글머리기호나(Bullet) 번호를 또 다시 꺼내든다. 이러한 번호는 문서내에서 열거할 일이 생길때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사업 추진의 다섯가지 필요성, 연구의 3대 목표, 10대 문제점같이 말이다.

난 위에서 두 가지 대표적인 번호체계를 언급했다. 첫번째는 목차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구성의 ‘순서를 정의하는 번호체계’이고 두번째는 개별 슬라이드내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열거를 위한 번호체계’이다. 이 두가지 형태의 번호가 슬라이드 문서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두가지 번호체계가 문서 전체에 적용된 모습은 아마 아래와 같을 것이다. 어떤 느낌이 드는가 ?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건 내용의 쉬운 이해를 돕기위해 사용된 번호체계가 오히려 청중의 내용 이해를 교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으로 돌아가라

번호는 기본적으로 ‘꼬리표’(Tag)다. 어떤 것을 지칭하며 가리키고 있는 것이 번호다. 이는 숫자가 될 수도 있고 문자가 될수도 있다. 애초에  왜 번호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난 번호를 사용하는 목적이 ①위치, ②순위, ③범주의 세가지라 생각한다.  번호의 첫번째 역할은 ①위치를 타나내는 것으로 순서, 주소, 소속을 가리키며 이때 번호가 절대적인 위치를 지칭하면 청중이 빠르게 그것을 찾아내도록 돕는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라는 유명한 성경구절엔 마태복음 19장 24절이라는 번호가 항상 따라붙는다. 논문과 책에 표시된 번호 역시 그를 지칭함으로써 독자들이 빠르게 그 부분을 탐색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오늘 배울 책의 장(Chapter)을 빠르게 펴도록 하려면 각각의 장에 번호를 붙여야 한다.  ‘8장 이원성의 법칙을 펴세요’라고 지칭하는 것이 그저 ‘이원성의 법칙을 펴세요’하는 것 보다 학생들의 탐색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겠는가.

두번째 역할은 ②순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중요성의 정도를 차별화 시키는데 사용한다. (1위, 2위, 3위…)나 (1등, 2등, 3등 …)은 단순한 나열이 아닌 서열과 중요도의 차이를 얘기하고 있다. 이는 세번째 역할인 ③범주와 곧 잘 혼동을 일으킨다. 범주는 번호와 숫자로 청중의 사고체계를 의도적으로 고착(나쁜의미가 아니다)시키기 위한 것으로 서열과는 관계없으며 쉬운 이해체계를 만들때 사용된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Seven habits)에서 ‘7’이란 숫자가 없었다면 독자들 십중팔구는 자신들이 기억하고 싶은 습관 몇 가지만 머리에 남겨놓을 것이다. 그러나 7이란 번호체계가 등장하고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일곱개의 빈칸에 들어갈 습관을 모두 기억하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 다섯개의 습관만 기억나고 나머지 두개가 기억나지 않는 상황을 사람은 견딜수 없어 한다. 제품,가격,유통, 프로모션의 마케팅 믹스는 잊기 쉽지만 Product, Price, Place, Promotion의 마케팅 믹스 4P라는 명칭이 붙고나면 잊기 힘든 체계로 변모한다. 이렇듯 번호는 범주 전체를 기억하도록 만든다. 가장 수준이 높은 번호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4P의 구성원들은 모두 중요하다. 즉, 이들에게 서열은 없다. 그러나 맨 처음 출현하는 Product는 무의식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된다. (내가 아무리 서열은 없다고 설명을 달아놓아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번호(Numbering)의 세 가지 원칙

지금까지 간단하게 ①위치, ②순위, ③범주라는 번호의 목적을 살펴보았다. 다시 처음의 예로 돌아가서 번호들이 목적에 맞게 잘 사용되었는지 알아보자.  먼저 목차등에 사용된 ‘순서를 위한 번호체계’이다. 아마 이 번호들은 ‘①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는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나 교재가 아니라 수 십페이지짜리 보고서에 불과하다. 적은 분량의 보고서임에도 제목의 분류체계가 Level1~3의 3단계로 너무 복잡한데 가장 작은 이야기 단위인 Level 3 타이틀을 세어보면 거의 30여개에 이른다. 30여개의 소소한 이야기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내는 것은 쉽지않아서 곧잘 이러한 형태의 레포트는 단순나열이 되기 십상이다. 이는 우리 보고서 문화의 고질적인 병폐중 하나이다.  사실 목차엔 굳이 번호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목차는 Level 2이내에서 10개 이하의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되는 것이 프레젠테이션에 적합하다. (사실 10개도 많다)

 목차의 구조가 간단해 지면 개별 슬라이드의 레이아웃에도 변화가 생긴다. 문서의 제목, 목차의 대/중분류(Level 1,2)까지 모두 슬라이드 마스터에 표시할 일이 없어진다. 즉, 실제 내용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슬라이드의 전체 모양이 더 단순해 지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번호는 두번째 ‘열거를 위한 번호체계’이다. 이는 앞서 설명한 ②순위, ③범주중 하나에 해당된다. 이 번호체계가 더 중요한 이유는 청중의 이해력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앞서 예로든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가지 습관, 마케팅 믹스 4P와 같이 전략적으로 잘 설계되기만 한다면 대성공이다. 그러나 아래 예제는 일단 문서 전반에 번호가 너무 자주 등장하다보니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변별력이 떨어진다.  또한 번호는 특정 내용을 지칭하는 것으로 문서내에서 유일무이 해야 하는데 같은 번호체계가 반복해 사용되고 있다. 1,2,3…이란 체계가 사용되었다면 다음은 A,B,C… 과 같은 형태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번호는 청중이 기억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몇 가지만 제시되어야 한다. 10개이상의번호는 너무 많다.

자, 번호에 대한  몇 가지 원칙을 다시 정리해보자.

윈칙 #1. 결정적일 때 등장시켜라

(=너무 자주 등장시키지 마라)

원칙 #2. 유일함(Unique)을 유지하라

(=번호의 중복을 막아라)

원칙 #3. 10개 이내로 줄여라

(=반대로 너무 적은 수에 번호를 붙이는 것도 피하라)

 

 

Case Study : 5+5 전략

 

위에서 설명한 번호를 사용하는 세가지의 목적과 세가지의 원칙은 슬라이드 작성의 국지적 전술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사실 번호는 전략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 전체 이야기를 이에 따라 설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2011년 6월 애플은 새로운 운영체제인 Mac OS X Lion의 프리뷰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200여가지의 신기능 중 주목할만한 10개 기능을 키노트를 통해 선보였다. 이야기의 구조를 10개의 주요 신기능에 맞추었고 청중이 각각의 이야기를 구분할 수 있도록 1부터 10까지 번호를 붙여가며 설명했다. 처음부터 번호를 가지고 이야기를 설계한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서구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OO를 위한 5가지 이유, OO를 피하는 10가지 방법 등 번호를 가지고 전체 이야기를 구성하는 경우가 잦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기에 널리 애용되고 있다. 나 역시 번호와 숫자로 이해의 틀을 제공하는 것을 즐긴다.

어느 게임회사의 컨퍼런스를 컨설팅하면서 많은 발표자들과 수 개월간 함께 1:1로 대화를 나누면서 심도있게 프레젠테이션을 설계한적이 있었다. A과장은 특정 시스템의 성과와 향후 계획에 대해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야기의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프레젠테이션에 담기는 내용이 너무 많아 청중이 요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시스템이 탄생하기 까지의 어려웠던 과정과 중점을 둔 사항들, 개발완료후 다른 시스템들과 비교하여 우수했던 점, 미래의 발전계획에 이르기까지 수십가지의 문제점과 수십가지의 도전과제들, 그 결과 구현된 수많은 기능, 앞으로 더 발전하기 위해 보강해야 할 수많은 사안들이 한데 어우러지자 앞에서 제시한 예제보다 더 복잡한 스토리가 초안으로 나왔다. 복잡한 이야기를 단순하게 풀어내는데 번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결국 나는 A과장에게 5+5구조를 제시했고 그 역시 혼쾌히 그 구조에 동의했다. 일순간에 이야기가 단순해졌다. 복잡한 구조를 단일화 하여 수많은 요건 중 대표적인 5개를 내세워 우수성을 강조하기로 했고 향후에 5개의 신기능을 포함하여 최고의 시스템을 유지한다는 줄거리였다.

 도입부를 지나 5가지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청중의 사고체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5’라는 숫자가 지배하게 된다.

각각의 문제는 그것이 실제로 문제라고 청중이 명확히 인식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며 설명되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문제1’이라는 번호체계가 등장한다.

번호는 그 자체보다 문자와 조합하여 명명되는 것이 보통이다. Step1, Step2, 와 같이 말이다.

5개의 문제점은 결국 그대로 5개의 도전과제 또는 5개의 요건으로 계승된다. 5라는 숫자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우리가 만든 시스템은 그 다섯개 문제점과 요건에 집중하여 이제는 그 다섯개가 우리 시스템의 최대 강점이 되었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문제1~5에 그대로 대응되는 혁신적인 기능의 명칭과 그 경쟁력을 하나하나 증명해 나간다.

5개의 핵심기능으로 최고의 반열에 올랐지만 이에 자만하지 않고 미래에 5개의 기능을 더해 5+5로 최고를 유지하려 한다는 내용이다. 번호는 문제1-느린속도-빠른속도-➊-Mach Speed와 같이 한줄기로 이어져있는 체제로 번호의 원칙 #1에 부합하며 Unique함과 적은 숫자로 나머지 원칙에도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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