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학살의 감상

By | 2011-08-11

우리 대표팀이 적지에서 라이벌 일본에 학살당하는 장면을 이렇게 차분하게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분한 감정이나 조바심보다는 그저 편안하게 강건너 불구경하듯 했으니 말이다. 지난 아시안컵에 나온 일본을 보고 나는 일본 대표팀 사상 최강의 전력이라 얘기했었는데 오늘 경기를 보고나니 그 생각이 굳어지게 되었다. 혼다 다이스케는 거의 샤비 에르난데스의 빙의라도 되듯 볼을 간수하는 능력과 센스있는 패스, 강력한 슈팅에 이르기 까지 일본팀 공수의 구심점으로 제 역할을 100% 다했고 이 때문에 카가와 신지가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엔도와 하세베는 혼다의 바로 뒤에서 홀딩 미드필더로서, 공격의 시발점으로서 맞상대한 한국의 이용래-기성용-김정우의 삼각편대를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

한국팀은 일본의 패스줄기를 전혀 제어하지 못했다.  3-4명이 지역을 지키는 형태로 한자리씩 배치되어 있었는데 일본의 공간침투를 제어해내지 못하면서 사람이 공과 함께 통과하는 것을 눈을 뜨고 지켜보고만 있는 형국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은 공격에서 볼을 빼았겼을 때 바르샤가 하듯 포어체킹을 강력하게 가져가면서 한국팀의 전진패스를 원천봉쇄하거나 패스미스를 유발하였고 볼을 재차 가로채 여러차례 위험상황을 만들어 냈다. 그나마 나가토모가 없었고 오카자키같이 부지런한 플레이어가 오늘 조금 부진했으니 망정이지 이들이 아시안컵에서와 같이 싱싱한 상태를 유지했었더라면 오늘 더큰 욕을 볼뻔도 했다.

한국팀의 오늘 부진을 보면서 역시 맨 처음 가지게 된 생각은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개개인의 실력으로는 여전히 일본과 대등하다는 생각이지만 팀으로 격돌했을 때 구심점이 없다는 것은 오늘의 결과와 같이 뼈아프다. 일본의 공격전개의 핵심은 혼다라 할 수 있지만 혼다가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은 역시 하세베와 엔도이다. 특히 하세베는 오늘도 혼자서 미드필드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다니면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모습이었는데 이런일은 10년전 김남일이 잘하던 일이었다. 김정우는 작년까지 홀딩 미드필더 역할을 하면서 올시즌 K리그에서 공격수로 거듭났는데 이 때문인지 오늘 기성용-이용래-김정우간 역할분배가 좀 모호한 측면이 보여서 이들이 번갈아가면서 공격형과 수비형 미드필더를 오갔던 것이 더 혼란을 부추기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소속팀에서 잘해오던 기성용 역시 오늘은 인내심이 바닥난듯 계속 눈살을 찌프리게 만드는 거친플레이를 연발하였고 그건 이용래-김정우도 마찬가지였다. 일본팀이 부담스러운 것은 혼다를 중심으로한 좌우의 카가와-오카자키 편대의 침투와 설상가상으로 이들의 뒤를 받치는 우치다-나가토모의 공격성향 때문이다. 오늘 이충성이 잘하긴 했으나 센터포워드는 잘나가는 일본의 몇개 남지 않은 숙제이기도 하다. 오늘 이청용-손흥민-지동원 등이 모두 출동하였다 하더라도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지는 못했을 듯 하다.

이근호를 바라보면서는 그저 안타깝다는 말밖엔 할수 없었다. 그 옛날 A 매치에 나섰던 김도훈을 보는 심정이었달까. 난 조광래 감독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취임 초기 나 역시도 조광래 감독에게 의문부호를 가졌으나 그의 축구철학이 드러난 아시안컵을 보면서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선수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조광래 감독의 축구철학과 전술에 깊은 신뢰를 보내고 있는지 말이다. 이번 한일전은 조금 이상한 경기이기도 했다. 시작부터 의욕이 좀 떨어지는 맛이 들었기 때문인데 인터넷을 보니 나만 그걸 느낀게 아니었다. 내부적으로는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자…인정하기는 싫지만 작금의 상황에서는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자리를 굳혀가는 인상이다. 다음달부터 열리는 월드컵 예선전까지 봐야겠지만 당분간 이 추세는 이어질 듯 하다. 우습지 않은가… 작년 5월초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대표팀은 역대 최악인 것 처럼 보였고 안방에서 열린 월드컵 출정식에서도 한국에 완패하며 거의 초상집분위기 였는데 말이다. 그동안 불세출의 선수가 탄생한것도 아니니 꼭 뭐에 홀린 기분이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우리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미 재료는 다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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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삿포로 학살의 감상

  1. 늙은여우

    스코어뿐 아니라 골의 그 순도만 봐도 너무 굴욕적이었습니다.
    3점만 내줘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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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맞아요~ 나중에 일본이 세골을 넣은후 풀어주지 않았으면 후반부의 골찬스 같은것도 없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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