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불붙는 ‘약’의 전쟁

By | 2011-01-22

어제 이런 저런 작업을 하면서 SBS시사토론 ‘감기약, 진통제 약국에서만 사야하나?’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패널로 네명이 등장했는데 의사와 약사 그리고 경실련, 녹색시민권리센터에서 나왔다.  내용은 사실상 양쪽으로 나뉘어 약국이 맞냐 편의점, 수퍼같은 데가 맞냐의 논쟁이었다. 훗~ 뭐 예상한대로 큰 결론없이 끝나버렸다.  이 시츄에이션이 참으로 어디서 본듯한 상황이라 포스팅을 하게되었다.

컨설팅이 직업이었던 나는 낯선 회사에 불려가서 주어진 과제에 대한 논리를 정리하면서 그 과제에 얽힌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어쩔수 없이 간파하게 된다. 아마 그 회사에서 나를 주도적으로 불러들였던 사람(혹은 집단)은 그 이해관계의 틀 내에서 나에게 특정논리에 대한 정당성 내지는 명분을 주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건 비단 컨설팅업무를 하는 나같은 사람 뿐만이 아니다.

직장내에서 어느정도 이상 직급이 올라가면 진짜 객관적으로(곧이곧대로) 레포팅하는 일이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 보고서를 쓰는 일은 공격과 방어의 논리를 장착하는 일과도 같게 된다. 그런일을 하면서 는 것이라곤 논리의 맥을 잡는 일이었다.

오늘 벌어진 시사토론은 그저 시사적인 문제를 떠나 우리네 회사나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과도 비슷하다. 밥그릇이 얽힌 일일수록 논쟁은 엄청나게 격화된다. 오늘 벌어진 토론을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되짚어보자. 파워포인트 블루스에서 항상 강조하는 이야기의 구조를 만드는 일과도 관계가 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카테고리에 실었다.

토론에 나온 사람과 안나온 사람들을 모두 큰 그림에 넣고 그들의 성향들을 그려보면 위와 같이 대강 4개의 집단으로 후딱 그릴 수 있다. 토론 처음부터 웃겼던 것은 진짜 소비자의 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제목부터가 잘못되었다.

마트나 편의점같은 유통업체는 여기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번 전쟁의 한켠을 지키고 있는 거대한 후원집단이다. 사실 이들은 마트나 편의점 등에서 약을 팔기위해 오랜시간 동안 잠수함같이 조용하게 애를 써왔다. 이들은 전면에 나서서 득될 것이 없다. 괜히 이익을 챙기려고 나대는 것 같이 보일까봐이다.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유리한대로 결론이 나면 못이기는척 의무를 다하겠다고 할 작자들이다. 만약 내가 이들편에서 컨설팅을 수행하는 사람이었다면 출연도 말렸을 것이고 안나온것을 잘했다고 칭찬할 것이다

언제나 약과 관련한 전쟁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집단이 약사이다.  당연히 이번 토론에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태도는 정말 문제였다. 패널로 등장한 분은 마치 개그프로그램의 남하당 대표를 보는 듯 해서 난 몇번이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는 실제로 남하당 대표같이 이런식으로 말했다. ‘이런 얘기가 이슈화 된다는 것~자체~~가 문제란 말이지’ 그는 국민앞에서 겸손했어야 했다. 나라면 계속 겸손을 주문했을 것이다. 상대방 진영이 이권을 취하기 위해 더 많이 나대는것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해 말이다

사실 이번 논쟁에서 가장 무능함을 보여준 역할이 정부와 토론의 사회자였다. 이 친구들은 문제의 본질과 주제 자체를 병신같이 설정하고 말았다. 이들이 들고나온 주제가 ‘약국이외의 곳에서 약을 파는것에 대한 것’인데  주제가 이렇게 설정됨으로 인해 처음부터 마트나 편의점에서 팔게하자는 의도를 내포해 버림과 동시에 약사측에서 방어하기 좋게끔 범위를 한정시켜 주었다. 약사측이 방어하기 좋다는 것은 그 주제를 ‘된다’ 혹은 ‘안된다’로 간단하게 반박할 여지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약사측은 끝까지 ‘약의 오남용’을 주된 논리로 내세워 방어했고 상대편은 이를 통렬하게 허물지도 못했다.  정부와 같은 조정자 역할을 하는 자가 이권에 눈이 먼 양쪽을 똑같이 압박하려면 양쪽 모두에 무거운 숙제를 내줬어야 했다.

즉, 주제를 ‘소비자가 휴일과 야간등에도 간편하게 약을 살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로 말이다. 이렇게 바뀌게 됨으로써 주제는 소비자를 본위로 한 중립적인 것으로 바뀌었고 약사와 약사가 아닌 집단 모두에 똑같은 부담의 숙제로 돌아갔다. 양측에 이 문제에 대한 대안을 각각 요구하고 이 두개의 대안중 어떤 것이 소비자에게 유리한지 서로 박터지게 싸워보라고 하는게 더 건설적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우스운것은 의사가 패널로 전면에 등장해 버린 것이다. 이미 수년전 약에 대한 패권이 약사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그들은 이번일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도 아닐뿐 더러 전면에 나설경우 예전에 약사들에게 당한 것을 보복하려는 모습으로밖에 비춰지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했어야 했는데 ‘일반인들이 약의 오남용에 대해 잘 모를수 있으므로 그나마 약을 잘 아는 의사로서 그들을 대변하러 왔다’고 했던 그 논리는 대단히 궁색해 보인다. 이들이 논쟁의 전면에 나서서는 이득이 될 것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직접 이해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일에 나서길 주저하게 되고 나선다 하더라도 일반인엔 복수극으로 비춰지거나 오버하는 걸로밖엔 안보이기 때문이다.  어쨋든 여러모로 잘못나왔다

사실 뚜렷한 입장표명도 없었고 패널로도 나오지 않았지만 의사들과 함께 약사들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는 한의사들도 이번 전쟁 구도의 조그만 변수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내 생각엔 나서서 득될 것이 1그램도 없기 때문에 끝까지 안나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분명 들썩거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이번에도 최대의 피해자는 소비자다. 양쪽 집단과 이해관계가 없는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누가 약을 팔든 관계없이 그저 간편하고 쉽게 약을 샀으면 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어린애가 있는 집 가운데 한밤중이나 주말에 해열제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응급실로 달려가는 집이 얼마나 많은가 ?  누구라도 이런 경험은 한두번쯤 해봤을 것이다.  이미 전쟁은 소비자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 소비자를 대변하는 것 처럼 나온 두명의 패널도 이런점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들이 소비자를 대변하는 사람들이었으면 주제를 ‘약국외에서 팔거냐 말거냐’가 아닌 ‘어떻게 쉽게 사게 할 것인가’로 몰아서 약사측이 ‘오남용’얘기만 되풀이 하지 않도록 막았어야 했다

소비자는 언제나 명분의 희생양이었다. 별별 이상한 권력자들과 집단이 맨 끝에가서 부르짖는 대의명분이 국민, 고객, 소비자 따위다. 그런일을 볼때마다 정말 기가찬다.

이러니 사실 토론 시작전부터 양쪽이 모두 한심해 보였다. 약사측은 계속 이런 논쟁 자체가 기가찰 노릇이라는 입장을 반복적으로 표현했다. 정말 불쾌한 모습으로 말이다.  난 소비자의 한사람으로서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제품과 서비스를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붙잡고 있으면서 개선하려 하지 않는 태도에 불쾌해진다. 앵무새 같은 그 오남용 얘기만 해도 그렇다.

그래 그들이 펜잘, 타이레놀, 게보린과 같은 책상서랍과 여자의 핸드백안에 쉽게 굴러다니는 그런 일반 의약품의 오남용을 막기위해 실제로 한게 뭐가 있나. 사실 약사측의 일관된 ‘오남용’론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내가 약사측의 컨설턴트였다면 오남용 뿐만 아니라 다른 비등한논리 2-3가지를 추가로 준비했을 것이고 오남용 논리가 공격받을 것에 대비해 개선책과 지금까지의 노력 등을 정리하여 얘기할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만약 내가 소비자 단체나 토론사회자, 정부측 인사였다면 약사들이 주장하는 ‘오남용을 막는 책임’에 대해 ‘실질적인 행동과 정책’을 요구하는 무거운 숙제를 내렸을 것이다.   (약사측은 자신들의 주도하에 오남용을 제도적으로 막는 실질적인  방안을 고안해 내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건 정말 그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사의 반대측 인사라면 이것을 오히려 공격무기로 삼아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했다)

사실 약사측 패널이 오늘 큰 과실을 여러번 저질렀다.  소비자들이 공휴일/야간에 약을 간편하게 사도록 하게 하기위해 70여군데의 약국을 실제로 운영했었다는 얘기에서 말이다. 이 사실은 실제로 노력했고 시행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플러스 점수를 받을만 했지만 이어지는 멘트에서 ‘심야에 오는 사람이 다섯명도 안되는데 이걸 어떻게 유지하나’라는 발언이 모든걸 뒤집었다.

약을 팔거나 병을 고치는 직업은 돈을 버는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즉, 생명에 대한 사업은 신성한 것으로 소수라도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란 것이다. 약사측 패널의 그 발언속엔 ‘장사를 하란얘기야 하지말란얘기야’라는 장사속이 배어나온다. 당연히 여론이 좋아하지 않을만한 내용인 것이다

어쨋든 이번 전쟁은 소비자를 뺀 대리자들의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고 소비자의 처지는 개선되지 않고 남아있을 가능성 또한 높다. 이런걸 정리해 내지 못하는 정부야 말로 가장 병신같으며 무능한 자들이라 하겠다. 자, 회사나 조직내로 돌아와 보자. 무능한 경영진이 이런식이다. 정리도 못하고 양쪽을 잘 나무라지도 못한채 이긴편이 빨리 나와주길 바라고 있다. 여러분들은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면서 꼭 어느편을 들어야 할 더러운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이건 조직생활자들의 숙명이다.  길은 두가지다 고지식하게 정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빵’ 터뜨리던지 눈딱감고 나쁜놈이 되는 것이다.

나쁜놈이 되려면 지금까지 말했듯 내가 대변하려는 쪽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처음과 같이 전체 구도를 그려놓고 각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라 여러분이 작성하는 보고서의 제목 자체가 바뀌거나 단어 하나의 쓰임새 또한 바뀌게 될 것이고 상대방에게 있어서는 두려움의 존재로 남게 될 것이다.  오늘은 평소의 파워포인트 블루스와 사뭇 어감이 틀리지 않은가 ? ㅎㅎ

맞다. 사실 이것이 내가 말하지 않는 파워포인트 블루스의 어두운 면, ‘다크 포스’이다 ^^


-.-;;  ……. 내가 퇴사한 이유가 딴데 있는게 아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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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thoughts on “또 다시 불붙는 ‘약’의 전쟁

  1. gundalpooh

    ㅎㅎ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토론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시간만 낭비하고 얻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겉치레 행사 밖에 안되는 것 같아요.

    특히, 우리나라는 정규교육과정이 이미 정해진 내용을 들입다 주입받는 식으로 이루어지니,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며 답을 찾아나가야 하는 토론같은 과정에는 정말 젬병이 되기 쉽다는 생각입니다!

    이럴땐 차라리 민주주의보다는 경쟁력있는 독재자가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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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확실히 날카로운 논리적 공방전이 아쉽긴 합니다.
      은하영웅전설이란 책에서 주인공 얀 웬리가 부조리가 판치고 무능한 정치인이 득실대는 민주주의와 정말 관대하고 모두가 살기좋은 전제주의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그래도 자기는 민주주의 노선을 선택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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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hydaddy

    올때마다 하나씩 배워가는 재미로 매일 들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읽는 재미와 더불어 많은 생각을 숙제로 주시네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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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답글 감사드려요~ 이미 뻔히 예상했으면서도 실제로 토론을 보고있으니 기가막혀서 즉흥적으로 몇자 적기 시작한 거랍니다 ~ 정말 생각해보면 우리도 조직내에서 이런걸로 갈등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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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aozora

    안녕하세요.
    기획을 잘했으면 하는 마음에 책을 구입하고 이 사이트를 알게된 후
    가끔씩 들르다가 답글은 처음 남깁니다.

    저도 토론 프로그램을 즐겼습니다만
    이렇게 각 이해관계자의 입장에서 논점을 정리해본적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토론프로그램을 보면 더욱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위의 캐릭터는 어디서 구하신건가요?
    혹시 직접 그리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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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캐릭터 그림은 가져온 것입니다. 정확히는 돈을 주고 사둔(?) 것이죠. 프레젠테이션때 위와 같이 사용할 목적으로 말이죠 ~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 사실 제일 무서운(?) 사람이죠 ^^ 그런 상대를 만나면 정말 벅차거든요. 전쟁에서 승리한 위대한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기본적으로 그런면이 발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어떻게든 흉내를 내보고 버릇을 그렇게 들이려고 노력 합니다만 남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게 참 어려운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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