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나 프레젠테이션은 내가 의도한 바대로 청중의 생각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에 동의하는가 ?  그렇다면 그 ‘의도’라는 것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내 생각에 ‘의도’라는 것은 내가 이런 내용을 전달했을 때 청중들은 ‘이렇게 생각해 주면 좋겠다’라고 설계하는 것이다.  우리 상품을 사달라고 제안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사람이나 경영진앞에서 사업계획을 발표하는 사람, 교수나 심사위원을 대상으로 자신의 연구실적을 발표하는 사람 모두 슬라이드에 모종의 의도를 담고 있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맥북에어를 처음 대중에게 소개할 때 ‘맥북에어는 얇고 가볍다’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려고 이 신제품을 노란 서류봉투에서 직접 꺼내 청중들에게 보여주었고 구태여 얇고 가볍다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지난 시간까지 설명한 영화 ‘킬빌’에서 타란티노 감독은 관객에게 끊임없이 궁금증을 유발시키면서 그에 대한 해답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면서 끝까지 관객이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시퀀스를 설계 해냈다.  감독이 관객의 반응같은 것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극을 끝까지 이끌었다면 재미없는 작가주의 영화가 탄생했을런지도 몰랐다.

자 그럼 자신이 지금까지 작성해 놓은 보고서들을 다시 한번 들춰내보라. 그 문서에서 당신이 의도했던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첫 챕터를 다 읽은 후엔 청중이 어떤 생각을 갖길 바랬는가 ? 또한 어떤 의문점이 새롭게 생겨났을까 ? 다음 챕터에서 나는 그에 대한 해답을 주었나 ?   아니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문서들은 그저 자기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위주로 작성되고 있을뿐 시시각각 변하는 청중들의 반응 따위는 신경쓸 여유가 없을 것이다.

재미없는 영화나 보고서, 프레젠테이션은 바로 이 지점에서 희비가 엇갈린다. 어떤 영화든, 보고서든 진행이 되어가면서 청중의 심정적인 동조를 얻지 못하고 막바지에 이르고 나면 결론에 해당하는 장면이나 슬라이드는 단 한방으로 심정적인 동조를 얻어내지 못했던 청중을 설득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청중들이 지금까지 폭발하지 않고 조용히 따라와준 것은 그래도 결론에서 많은 의문점들이 풀리게 될 것을 기대해서 였을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보고서의 흐름은 청중에게 지속적으로 복선을 제시하고 그들 스스로가 내가 의도한 결론을 알아맞추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끄는대로 결론에 다다랐지만 마치 스스로 그것을 찾아낸 것 처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시퀀스 설계의 핵심은 청중의 반응을 설계하는데 있다. 사실 이 부분이 스토리텔링의 핵심이다. 예제를 통해 구체적인 시퀀스 설계에 대해 알아보자.


예제 : A쇼핑몰의 해킹사건

지난번 연재에서 예고한대로 이미 파워포인트 블루스 시즌1과 책에 나온바 있었던 A쇼핑몰 해킹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A쇼핑몰은 온라인 쇼핑몰로서 지난 수요일 DDOS 로 보이는 공격을 당해 수시간 동안 서버가 다운되었고 이에 따라 영업에 차질을 빚어 시간당 2천만원의 손실을 보았다. 이에 경영진은 IT부서에 사고경위 등을 파악해 다음주 초 경영회의 시간에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이 보고서를 통해 경영진이 기대하는 바는 사건의 경과와 정확한 피해상황, 원인파악 그리고 우리의 대응조치가 적절하였는지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IT부서의 생각은 좀 달랐다. 해킹의 위협이 앞으로도 커지게 된 만큼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해킹 공격에 대한 확실한 솔루션을 시스템적으로 보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번 보고에 그러한 내용을 추가적으로 싣고 솔루션 도입의 타당성을 설득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내용을 이번 보고서에 실어야 할까 ? 일단 경영진이 기대하는 내용을 모두 전달한 다음 이들에게 ‘해킹의 위협이 모두 가시지 않았다’라는 점과 ‘현재와 같이 인력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다’라는 점을 일단 확고하게 인지시키는 것이 첫번째라고 생각된다.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첫번째 허들이자 방어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에 명분을 실어주게 된다.

첫번째 시퀀스를 보자 IT부서의 팀장은 침착하게 일단 사건 경과와 원인 조치사항 등 경영진이 기대하는 내용을 먼저 모두 전달한 다음 마지막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끝낸다. 이번 사건은 일단 끝난것 처럼 보이지만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경고였고 그 경고가 경영진의 주의를 끌게 되면 성공이다.  경영진은 이번 사건이 앞으로도 반복될 거라는 예상에 대해 더 자세한 사항을 듣길 원한다.

두번째 시퀀스가 가장 중요하다. IT부서에서는 경영진에게 해킹이 우리회사에 정말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음을 증명해야 한다. 또한 우리회사의 대응수단이 보잘것 없고 앞으로 해킹이 피크타임때 발생하게 되면 그 피해는 이번 사건보다 확실히 더 크다는 것을 인지시켜 ‘모종의 조치’가 필요함을 각인시켜야 한다.

경영진이 일단 위기의식을 갖게 되면 해결책을 요구하게 되는데 IT부서에서 산정해 보니 해킹 방어 시스템 도입에 5천만원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투자에 민감한 경영진이기에 5천만원의 예산을 통과시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 여긴 팀장은 5천만원이란 숫자를 상쇄시킬 숫자를 강구하게 되는데 이 숫자가 직전에 얘기한 ‘피크타임 해킹시 시간당 6천만원 손실’예상이다.  미리 6천만원 손실예상을 내놓았기에 그 직후에 나오는 5천만원의 투자는 상대적으로 저렴해보이기 까지 한다.

시퀀스2의 마지막은 5천만원의 투자에 대해 가부를 결정하는 그야말로 결정적인 순간이 되겠다.

앞으로 이어질 시퀀스3는 5천만원을 가지고 어떤 솔루션을 선택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고 시퀀스4에서는 선정된 대안을 어떻게 적용시키고 향후엔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에 대한 내용인데 IT부문에 비전문가인 경영진은 큰 무리가 없는 이상 IT부서의 판단을 믿고 따르기로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실질적으로 시퀀스2에서 결론이 나도록 설계된 것이다.

그럼 지난번 연재에서 제시한 방법대로 시퀀스를 정리해보자.


  • 시퀀스 #1 : 사건경위 및 조치사항
    • 내용 – 지난 수요일 일어난 접속장애는 의도적인 DDOS 공격이었으며 신속한 차단조치에 의해 약 2천만원의 손실을 입고 종료되었으나 재공격 가능성이 높고 대응수단이 적어 피크타임 공격시 큰 피해가 우려됨
    • 의도 – 문제제기를 통해 해킹에대한 관심과 궁금증을 유발함
    • 청중의 반응  – 이번 사건의 조치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재발우려가 있다니 그게 무슨말이지?
  • 시퀀스 #2 : 현황 및 대응방향
    • 내용 – 다시 해킹당할 확률이 80%가 넘고, 피크타임 발생시 시간당 6천만원의 손실이 예상되지만 경쟁사들에 비해 당사의 시스템 여건이 미비. 따라서 5천만원을 투자하여 방어시스템을 구비해야함
    • 의도 – 해킹의 심각성을 각인시킴과 동시에 5천만원의 투자금액을 시간당 6천만원의 예상손실로 상쇄시킴
    • 청중의 반응 – 우리도 해킹의 안전지대가 아니군. 예상손실에 비하면 방어시스템 구입이 비싸지 않은거군
  • 시퀀스 #3 : 대안평가
    • 내용 – 국내 3개 솔루션중 A사의 솔루션을 채택함
    • 의도 – 합리적이고 공정한 선택으로 보이도록 함
    • 청중의 반응 – IT부문은 해당 부서가 전문가이니 선정과정만 투명하면 문제될 것이 없어
  • 시퀀스 #4 : 예산 및 일정
    • 내용 – 향후 3년간 지속적으로 방어체계를 발전시킴
    • 의도 – 신속하게 도입하고, 추가적인 시스템 보완의 길을 터놓음
    • 청중의 반응 – 빨리 도입, 구축해서 가까운시일내에 같은 사건이 안생기는 것이 중요하지


의도한 대로 이끄려면 반응 설계가 필요하다


청중은 두가지 종류의 반응을 가지게 된다. 애초에 이 보고서에 기대하는 바에 대한 반응이 첫번째고 우리가 청중에게 새롭게 가한 자극으로 인해 생긴 궁금증에 대한 것이 두번째다.  청중이 기대하는 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기획의 첫번째 단계인데 이를 나는 ‘질문을 통한 주제파악’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청중이 애초에 기대하는 것은 천하의 스티브 잡스라 하더라도 충족시켜주기 어려울 때가 있다. 최근 애플의 신제품 발표 키노트는 예전에 비해 그 반응이 열광적이지 않다. 그것은 신제품 루머에 비해 실제 잡스가 들고나오는 제품이 기대 이하인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이제는 그만큼 애플의 신제품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아진 탓이다. 만약 당신이 조직내의 유능한 기획자라면 경영진들의 기대감은 당연히 높을 것이며 보고서 초반을 기대수준을 현실화 시키는 데 할애해야 할지도 모른다.

두번째 종류의 반응을 설계하는 것은 보다 고차원적인 일이다. 청중들이 가지는 생각의 물줄기를 새로운 자극을 통해 완전히 내쪽으로 돌려놓는 일이니 말이다. 위에서 예로든 ‘보안시스템 도입’ 예제가 바로 그렇다.  이 보고서는 첫번째 시퀀스에서 경영진들이 기대했던 내용을 모두 안전하게 전달하고 나서 그들을 자극하여 완전히 또 다른 보고서를 새롭게 시작하려 설계되었다.

올해 초 연재했던 ‘건조한 보고서에 생명력을 불어넣기‘편에서 나는 ‘Do you know ?’ 슬라이드로 청중에게 ‘자극’을 주어 우리회사의 고객관리 체계가 얼마나 허술했었는지 경영진에게 어필하고자 했었다. (실제로 이 방법은 실전에서 먹혀들었던 방법이었다)

시퀀스 설계의 핵심은 청중들이 머리속에 가지게 될 반응의 흐름(Flow)을 내 의도대로 제어하는 것이다.  우리가 문서작성 초기에 생각해 내는 목차들의 제목(이게 바로 시퀀스다)은 언제나 비슷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세부목차의 제목이나 배치 순서가 아니라 청중의 반응을 예측하여 시퀀스간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대개 3막구조를 가진다. 서두에서는 보통 이야기와 등장인물의 배경에 대해 설명하거나 갈등을 촉발시키는 사건을 내세워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관객들에게 사전지식을 공급한다. 이어지는 제 2막에서는 갈등이 고조되고 마지막으로 그 갈등이 해소되는 결말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보고서도 전체적인 맥락은 이를 닮아 있다. 서론 부분의 1~2개 시퀀스를 통해 우리는 문제의 배경을 설명하고 본론의 2~3개 시퀀스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원인을 분석하며 개략적인 방향성을 잡는다. 마지막 결론부분에 이르러 2~3개의 시퀀스를 통해 확실한 대안을 제시함과 동시에 대안실행에 대한 제반사항을 다루면서 끝을 맺는 것이 보통이다.

청중은 우리 생각보다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프레젠테이션 내내 단 한번의 질문과 대답이 오고가지 않았더라도 청중의 생각은 내 발표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며 논리의 비약이 있거나 이야기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할 때 표정들이 일순간 변하게 되고 적극성을 가진 청중들은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위 슬라이드를 자세히 보라. 2001년 국내 유통산업의 주요 시사점을 요약 정리해 놓은 것으로 이 슬라이드 자체는 텍스트가 너무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보통 우리는 보고서의 도입부에 위 슬라이드와 같이 업계동향과 시사점 등을 얘기하며 시작하곤 한다.  이 슬라이드 다음에는 유통업에 대한 어떤 내용이 나와도 무리가 없을듯 하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어떠한 의도도 엿보이지 않는다는 점 말이다. 이 레포트는 실제로 어느 유통업체의 CRM도입을 제안하기 위해 씌여진 것이다.

이 슬라이드 뒤에 CRM의 중요성에 대한 얘기가 나오려면 적어도 이 슬라이드가 말하는 일곱가지의 시사점중 하나로 CRM과 관계있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해서 그 다음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야 했다. 적어도 이 슬라이드를 시작으로해서 CRM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자면 앞으로도 슬라이드 몇장은 더 통과해야 비로소 CRM이란 단어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슬라이드가 없어도 이야기 진행에 무리가 없다면 이 슬라이드는 삭제되는 것이 맞다.  만약 이 슬라이드 직후에 ‘CRM은 중요하다’란 내용이 나온다면 그것은 비약이 지나친 것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늘상 범하는 실수중 하나이다. 모든 슬라이드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어떻게든 결론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전개

다음 연재부터 나는 보고서의 서론-본론-결론 부분에서 자주 쓰이는 10개의 뻔한 시퀀스들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올바른 용례와 원칙, 그리고 잘못된 사례들을 설명해 나갈 생각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플롯과 시퀀스의 개념들이 조금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고 적용하기 어려웠다면 조금 더 힘을 내기 바란다. 이제부터는 실전에 막바로 적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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