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엔 영화 킬빌(Kill Bill)을 통해 플롯을 소개했고 (특히 복수극 플롯) 실제 보고서와 프레젠테이션의 세계에서는 ‘해결사 플롯’과 ‘서사시 플롯’이 주류를 이룬다는 나의 주관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플롯은 영화와 문서에서 가장 기본적인 뼈대가 되는 몇 줄의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되지만 사실 플롯이 ‘확립되었다’는 것은 게임이 절반이상 끝났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미 결론이 확고하게 도출되었음은 물론이고 결론을 떠받칠 이유와 명분 등 주요 논리와 그를 증명할 증거를 막연하나마 확보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주제를 부여받은 순간부터 플롯을 확립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서 주제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 오가고 질문과 답변방식의 ‘메시지의 구조체’가 만들어진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부분에 대한 것은 ‘파워포인트 블루스’의 연재 초기 부분에서 이미 다룬바가 있었다. 여러 대안(결론)을 평가하고 그에 대한 이유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Feature, Benefit, Advantage’라는 방법을 이용해 논리를 검증해 보라고 최근의 연재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플롯은 영화의 전부인 것 처럼 보고서에 있어서도 ‘플롯’이라는 구조체는 절대적인 것이므로 앞으로도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여 이 과정을 다각적으로 설명할 예정이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하다만 킬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시퀀스 : 이야기의 배치

타란티노 영화의 팬으로서 상상해 보건데 그의 맨 처음 아이디어는 금발의 여전사가 복수극을 펼친다라는 단순한 아이디어로 시작해 그가 열광하는 동양의 무술, 그것도 일본의 검술과 중국의 권법, 이소룡을 닮은 노란색 의상이라는 복수 수단을 미리 정해 놓고 앞뒤의 요소들을 배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복수 대상은 몇명으로 할지, 그들에게 복수할만한 어떤일을 당했는지 계속 자기자신과 친구들에게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전체적인 플롯을 확정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자기가 평소에 흥미롭게 생각했던 소재들을 모조리 영화에 올려놓아 버무려 놓았는데 쉽게 어울릴것 같지 않은 황당한 요소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결국 관객들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플롯은 영화나 보고서의 ‘전부’라 할만큼 중요하지만 이야기의 ‘재미’를 만드는 것은 이제부터라 할 수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압박감은 끝까지 관객의 긴장감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롯이 괜찮다는 것과 영화가 재미있다는 것과는 사실 전혀 별개의 일이다.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느냐에 대한 것은 이야기의 배치, 즉 시퀀스를 어떻게 전개시킬 것인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타란티노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킬빌은 참극-준비-복수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복수극으로서 그 플롯에는 8개 요소를 담고 있었다. 주인공이 참변을 당하는 하나의 사건과 복수극을 준비하기 위한 두가지 수련, 그리고 다섯명의 복수 대상으로 말이다. 타란티노는 이 여덟개의 요소들을 여덟개의 시퀀스로 시간순으로 늘어놓기만 해도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랬더라면 영화는 재미 없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타란티노가 어떻게 했는지 보자. 그는 다섯명의 복수 대상자들에 대한 각각의 복수행위들을 기본적인 시퀀스로 먼저 깔아 놓고 시작했다. 그 사이에 두개의 준비과정을 끼워넣었고 참극에 대한 하나의 사건을 퍼즐처럼 쪼개어 전체에 흩뿌려 놓았다. 그리고 1번과 2번 복수대상자의 순서를 바꾸어 놓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10개의 시퀀스로 된 영화를 완성했다. (그는 친절하게도 관객에게 10개의 이야기들을 Chapter번호와 제목을 달아 알려주기까지 한다)

그저 플롯에서 설명했던 3단계의 순서로 영화를 물흘러가듯 만들었으면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타란티노 감독은 왜 이야기를 조각내어 전체에 흩뿌려 놓았을까 ? 실제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매 시퀀스 조각마다 새로운 의문점이 생기는데 감독은 지능적으로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하나씩 쥐어주며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게 극을 끌어나간다. 그리고 영화를 끝까지 보게되면 그제서야 모든 퍼즐조각들이 모두 맞아들어가게 되는 색다른 경험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그는 관객들이 보일 수 있는 궁금증과 해답을 지능적으로 흩뿌리면서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시질 수 있는 능력을 시퀀스 배치를 통해 입증시켰고 이는 언제나 관객의 머리위에서 그들의 반응을 치밀하게 계산했기 때문에 얻어낼 수 있었던 결과였다. 첫번째 시퀀스를 예로 들어 정리해보자

#1. 두번째 표적

• 내용 : 베아트릭스가 머리에 총에 맞는 장면에 이어 두번째 표적인 베르니카를 그녀의 집에 찾아가 제거한다.

• 의도 : 주인공이 뭔가에 당했고 그에 대한 복수극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관객에게 알림과 동시에 관객의 주의 집중을 위해 수많은 의문점들을 남긴다

• 예상되는 반응 : ① 뭔지 모르지만 벌써 복수극이 시작되었구나 ② 주인공은 어떻게 살아났을까 ? ③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정상적인 주부로 살아가는 베르니카를 그녀의 아이가 있는 집에서 죽이는가 ? ④ 첫번째 표적은 어떻게 되고 두번째부터 보여주나 ?

두번째 시퀀스에서 감독은 관객의 예상되는 궁금증들을 일부 해소시켜줌과 동시에 또 다른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며 끝까지 같은 방식으로 긴장감을 유지해낸다. 그는 사실 이렇게 이야기 전체를 분해하여 배치를 바꾸고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모든 퍼즐이 조립되게끔 하는데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그의 다른 작품 ‘저수지의 개들’이나 ‘펄프 픽션’ 또한 시종일관 감독이 관객들을 마음대로 끌고다닌다.


시퀀스 어프로치가 중요한 이유

영화는 대게 10개 남짓의 시퀀스들로 이루어진다. 이 10여개의 짧은 이야기들을 끼워 맞추어 전체가 완성되는데 시나리오 작가들의 난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의 감정적인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체의 극을 시퀀스별로 나누어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서론-본론-결론으로 크게 나누어 큰 덩어리로 취급하게 될 때 생기는 문제점은 너무 집중한 나머지 중간 부분에서 막다른 골목이나 개미지옥에 빠져들어 모래늪 처럼 헤어나오지 못한채 갇혀버려 중간과정을 건너뛴 채 희안하게 결론에 도달하거나 하는 경우가 잦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이 시퀀스 어프로치인데 마치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진 10여개의 영화를 이어붙이기 하듯 만든다는 것이다. 위의 킬빌의 예에서 보듯 각각의 시퀀스들은 그 자체로 결론을 가지고 완전히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할 것은 시퀀스 자체에서 해결하되 의문점을 남기고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그것을 받아 처리함으로써 영화 전체의 결론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시나리오 시퀀스로 풀어라, 폴 조셉 줄리노, 황매, 2009)

영화산업에서의 이러한 시도는 우리가 논리적인 구조를 가진 보고서나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만드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종종 막다른 골목이나 개미지옥에 빠져든다는 표현은 복잡한 보고서를 설계할 때 그 내용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머리속이 완전 뒤엉켜버리는 우리의 상황과도 같다. 시퀀스 어프로치는 쟝르는 다르지만 우리의 스토리 설계에 그대로 들어맞는 체계이다.  우리는 앞으로 한덩어리의 커다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레고블럭과 같은 최소단위의 이야기들을 단계적으로 합쳐가는 방법에(일명 ‘Building Block’) 대해 알아볼 것이며 시퀀스 어프로치는 이를 위한 시작단계이다.

우리의 문서들은 이미 시퀀스 개념을 지니고 있다. ‘목차’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와 다른 점은 영화가 10개 내외의 시퀀스를 가지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보통 5-6개 정도로 비교적 단촐하게 구성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단촐하다 보니 영화에 비해 이야기 얽개를 구성하기가 수월한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퀀스를 구성하면서 가지는 최대의 약점은 시퀀스간의 전환과 인과관계 구성이 미흡했다는 점이고 바로 이러한 점이 프레젠테이션을 지루하게 만들거나 실패로 몰고가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마디로 시퀀스와 시퀀스를 연결해주는 이음새가 없이 서로 따로 노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파워포인트 블루스 연재 초기에 등장했던 예제의 목차 슬라이드를 다시 한번 보도록 하자.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자신이 작성한 문서의 목차를 열어 놓고 시퀀스 하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라.

a. 이 시퀀스의 주요내용

b. 이 시퀀스로 내가 의도하는 바

c. 이 시퀀스를 읽고 청중이 알게 될 사항과 새로운 의문

정리하는 방법은 위의 킬빌의 첫번째 시퀀스를 정리했던 방법과 같다. 어떤가? a는 어떻든 정리할 수 있지만 b와 c는 좀 생소하지 않은가 ? (위의 예제 문서 전체에 대한 시퀀스 정리와 그에 대한 설명은 다음 연재때 자세히 하기로 하겠다.) b와 c는 다음 시퀀스로 넘어가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되는데 나는 이것을 ‘청중의 반응을 설계한다’ 라고 말한다. 마치 타란티노 감독이 능수능란하게 관객들을 영화의 끝까지 긴장감있게 이끄는 것 처럼 우리도 청중들의 반응을 예상하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타란티노 감독처럼 정밀하게 플롯을 조각내어 재배치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난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웬만한 이야기꾼이 아니라면 힘든 일이라 생각한다. 잠시 저 위의 목차를 다시한번 쳐다보라. ‘개요’, ‘현황 및 대응방향’, ‘대안평가’, ‘예산 및 일정’ 등 4개의 시퀀스들은 독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목차 몇 개와도 일치할 만큼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상투적인 단어와 천편일률적인 순서는 비단 나쁜것 만은 아니다. 타란티노는 영화감독으로서 관객들을 영화의 끝까지 계속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데리고 가야하기 때문에 관객들의 의문점에 좀 처럼 속시원한 답변을 주지 않은채 끝까지 끌고가는 반면 우리는 청중의 마음속에 새롭게 생겨난 의문점을 바로 다음에 이어질 시퀀스에서 명확하게 답변하고 넘어가야 한다. 보고서와 프레젠테이션을 수없이 접한 청중들은 일종의 학습효과에 의해 처음에 ‘업계동향’같은 것이 등장하며 이어서 우리의 ‘문제점’과 그에 대한 ‘해결방향’등이 순차적으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하게 되는데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그들이 익숙하게 이해해왔던 틀을 바꾸기 보다는 그들이 예상하는 지점에 정확히 명확하고 단순한 정보를 놓아 두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영화와는 달리 청중이 더 일찍 결론을 납득하게 되는 것이 허용되며 그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수년전 나는 고객사를 위해 15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발표하게 되었는데 초반부터 청중(보고받는 경영자)이 스스로 결론에 도달하게 끔 계속 복선을 깔아두었고 정확히 15페이지중 2페이지에 도달했을 때 청중 스스로 내가 원하는 결론을 말하게끔 만드는데 성공했다. 즉, 내 영화는 2페이지에서 사실상 끝났고 나머지 페이지는 그저 훑어내려가는 것으로 보고를 10여분만에 종결하게 되었다. 타란티노 감독에게는 청중을 끝까지 붙잡아 두는게 중요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빨리 끝날 수록 바람직하며 그를 위해 저 목차 페이지에서 보여지는 뻔한 시퀀스 제목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장황하게 한 얘기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항상 사용하는 뻔한 시퀀스 제목을 그대로 이용하되 청중의 반응을 설계하는 것이 시퀀스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

플롯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시퀀스를 거쳐 슬라이드 한장 한장과 슬라이드 한장에 포함된 내용들의 블럭(Block)에 이르기 까지 상세하게 이어질 예정이고 이번 시리즈가 어찌보면 파워포인트 블루스가 추구하는 ‘이야기를 구축’하는 핵심내용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위에서 예로든 문서 전체의 시퀀스를 어떤 방법으로 정리하였는지에 대한 사례를 자세히 보이기로 하겠고 또 이어질 연재에서 우리가 ‘해결사 플롯’에서 자주 사용하는 뻔한 10개의 시퀀스를 제시하고 그 시퀀스들을 제대로 작성하는 방법을 사례를 들어 하나하나 설명하기로 하겠다.  그 이후엔 플롯과 시퀀스 전체를 아우르는 에세이 체계와 슬라이드 분할, 각 슬라이드내의 이야기 블럭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연재가 꽤나 길게 이어질 예정이니 관심있게 지켜봐주길 바란다.


참고서적 : 시나리오 시퀀스로 풀어라

– 시나리오 시퀀스로 풀어라

– 폴 조셉 줄리노 지음. 김현정 옮김

– 황매

– 2009년

이 책은 그야말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들이나 보는 영화전문서이다. 이 책이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작용했던 것은 ‘에어포스 원’의 시나리오를 썼던 앤드류 말로우의 서문대로 120페이지짜리 괴물(시나리오를 말함)을 다루기 수월한 구획으로 나누고 따르기 쉬운 극적 지도를 제공하여 작가들에게 2막이라는 늪지대를 헤쳐나갈 수 있는 프레임웍을 제공해 준다는 점이었다. 전체 이야기를 구획화 해준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내가 관심있는 보고서 쓰기라는 쟝르와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그 프레임웍 만큼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는 11개 영화의 시퀀스를 분석하고 있는데 각 장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시퀀스 요약, 분석 부문은 내가 찾고 있었던 ‘시퀀스별 요약 정리방법’과 정확히 들어 맞았다.

언제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어려움을 겪는 프리젠터라면 인식전환을 겸해 한번쯤 읽어볼만 한 서적이지만 모두에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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