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프레임웍

난 프레젠테이션과 보고서의 많은 부분이 영화의 극적인 개념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산업에서 지난 100여년간 (아니 연극까지를 염두한다면 지난 수천년간) 감독과 극작가들의 작업은 작은 효율성도 놓치지 않고 생산성으로 연결시키려는 기업의 활동보다도 오히려 더 구체적이고 효과적이었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플롯과 시퀀스 등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웍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극의 배치를 연구하고 고민하는 동안 기업의 수많은 지식노동자(어쩌면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수십 수백배가 되는)들은 매일같이 자신의 시나리오를 경영자들에게 어필하기위해 노력하면서도 그 어떠한 프레임웍도 없이 똑같은 고민을 반복하면서 어려움을 겪어왔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프레임웍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런 대목 때문이다.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사람과 어느 회사의 기획자를 앞에 두고 두 사람에게 똑같이 자신이 만든 영화와 보고서에 대해 1분 이내로 핵심을 요약해 줄 것을 부탁해 보면된다. 영화쟁이들은 자신의 영화가 90분이건 120분이건 자신의 영화를 단 한마디로 얘기할 수도있고 1분정도로 얘기할 수도 있으며 그 이상으로 얘기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다.  그들은 영화의 플롯(Plot)이나 시놉시스(Synopsis), 시퀀스(Sequence)란 개념을 통해 언제든 주어진 시간안에 작품을 훌륭하게 표현할 도구(Framework)의 사용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반면 기업의 기획자들은 대부분 ‘1분’이란 시간에 당황하면서 장황하게 서론을 늘어놓다가 1분을 넘기기 일쑤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보고서나 프레젠테이션 구조를 설계하기 위한 프레임웍을 영화로부터 찾을 생각을 하였고 전혀 달라 보이는 쟝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서 그것이 유용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킬빌(Kill Bill) : 전형적인 복수극

쿠엔틴 타란티노가 2003년-2004년에 2부작으로 내놓은 킬빌은 전형적인 복수극을 담고 있는 오락영화이다. 먼저 이 영화의 간단한 플롯을 보자.

‘최고의 암살자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일에 회의를 느껴 조직을 떠나지만 빌 일당의 보복으로 모든것을 잃고 만다. 이에 그녀는 그들 모두에게 차례로 복수한다’

플롯은 이야기의 구조를 나타내며 연결되는 일련의 사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논리적인 배치이다. 따라서 그저 건조한 ‘Story’라는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아래 예에서 보듯 플롯은 원인과 결과를 담고있어야 한다.

이야기(Story) : 왕이 죽었다, 왕비도 따라죽었다

플롯(Plot) : 왕이 죽으니 왕비도 슬퍼 따라죽었다.


복수극은 대부분 이해하기 쉬운 오락 영화일 경우가 많고 킬빌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대개의 경우 복수극 플롯은 다음의 3단계로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1단계는 ‘참극’이다. 주로 주인공 자신이나 가족, 사랑하는 사람이 악당들에게 비참하게 희생당하는 장면으로 복수극의 필수코스이다.  2단계는 ‘준비’이다. 현재의 실력으로는 적들을 상대하기 버거우므로 주인공은 실력있는 스승을 만나거나 새로운 무기를 얻어내어 복수에 대한 기대를 높이게 된다. 3단계는 ‘복수’로 자신에게 불행을 안겨준 악당들을 찾아내어 차례로 그들을 물리치는 장면이다.

이렇게 3단계로 이어지는 복수극 플롯은 킬빌뿐만 아니라 비슷한 주제를 가진 수많은 영화들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예를들어 오래전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던 성룡의 ‘취권’을 보자. 성룡은 스승인 소화자에게 취권을 배우는 게으른 제자였지만 악당에게 스승인 소화자가 당하고나자 절치부심하여 스승의 권법으로 마침내 악당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참극-준비-복수의 3단계 과정이 거의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복수3부작’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악당과 피해자의 구분이 매우 모호하고 서로에게 복수하고 복수당하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마지막에 이 두개의 복수는 한꼭지점에서 만나며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다. 이 영화 역시 두명이 서로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는 ‘참극’과 ‘준비’, ‘복수’의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자 다시 킬빌로 돌아와 보자. 많은 복수극들은 이미 관객의 눈에 익어있는 구조이다. 뻔해 보이는 복수극이 관객들의 동질감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자극제가 필요하다. 영화팬의 한 사람으로서 복수극의 4가지 자극제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첫번째 자극제 : 주인공은 복수하기 충분할 만큼 당했는가

첫번째는 주인공이 복수하기 충분할 만큼 철저하게 당했는가 이다. 주인공이 얼마나 처절하게 당했는가는 관객의 동조를 얻어내기 위한 필수 장치이다. 주인공 베아트릭스는 결혼식 당일 자신은 물론 배속의 아기와 신랑, 10여명의 하객들을 모두 잃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고 극적으로 혼자만 살아남았다.

두번쨰 자극제 : 적들은 상대하기 버거울 만큼 강한가 ?

두번째는 적들이 상대하기 버거울 만큼 충분히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공에게는 힘들겠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과연 주인공이 이러한 강적들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지가 주요 관심사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세번째 자극제 : 적들을 상대하기 위한 무기는 충분히 신선한가 ?

세번째는 적들에 대항할 무기는 충분히 신선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룡’은 취권’으로 복수를 했고 그 당시 취권은 많은 동네 아이들이 흉내내는 유행코드였다.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들고나오는 장도리 역시 충격적인 수단중 하나였다. 킬빌은 일본의 검과 중국의 권법을 들고 나왔고 금발의 베아트릭스는 이소룡을 연상케하는 노란바탕의 줄무늬 인상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관객에게 새겼다

네번째 자극제 : 복수의 과정 또한 충분히 고생스러운가 ?

네번째는 복수하는 과정도 충분히 고생스러웠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두번째 자극제와 연결되는 것으로 주인공이 극복해야할 과정이다. 베아트릭스는 모든 복수 대상으로부터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는데 버드에게 생매장 되는 부분이 하이라이트이다.

자 이 네가지 자극제가 복수극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관객은 이러한 자극제로 주인공이 베아트릭스와 하나로 연결되어 자신이 주인공이 된 양 악당을 찾아나서는 베아트릭스에 동조하게 된다.


보고서/프레젠테이션의 전형적인 두가지 플롯

나는 기획자들이 써내는 보고서의 대부분이 킬빌의 복수극과 비슷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기업이나 단체들은 끊임없는 개선을 통해 자신들의 활동과 성과를 진보시키길 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플롯은 우리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할 수 있다. 이것을 나는 ‘해결사 플롯’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예를 들자면 이런식이다.

많은 보고서, 논문 등이 어떠한 현상에 대한 개선점으로 새로운 방법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형태이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구조도 있다. 나는 연재나 강의를 통해 이러한 질문을 많이 받아왔다.

“선생님,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라든가 정기적인 경과보고서 등의 경우는 그런 극적인 형태를 취하기가 어렵습니다”

보통 이런 형태의 프레젠테이션이나 보고서들은 특별히 ‘결론’이 나오지 않고 그저 적절하게 이해하기 쉬운 배치로 사건이나 현상, 원리들을 담담하고 간결하게 전달하는데 초점이 맞추어 진다. 이러한 형태를 ‘서사시 플롯’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서사시 플롯의 전형 : 주간보고, 경과보고서, 교육자료 등


정리해 보면 우리가 작성하는 보고서의 플롯은 ‘해결사 플롯’과 ‘서사시 플롯’의 두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서사시 플롯은 주간보고, 월간보고 등 정기적으로 사실에 의거해 핵심적인 내용을 정형화된 포맷으로 요약해 보고하는 반복적인 작업들과 원리나 지식을 설명하려는 교육용 포맷 등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서사시 플롯’엔 원인과 대안이 들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공식에 의해 ‘이렇게 작성하면 된다’라는 전형적인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아 ‘플롯’이라 부르기도 어렵다.

‘서사시 플롯’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해결사 플롯’에 집중 하기로 하겠다.

해결사 플롯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형태이다. 복수극은 참극-준비-복수로 이어지는 3단계 플롯인 반면 해결사 플롯은 참극-준비까지의 2단계 구성이 일반적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위기(또는 문제점)-대안이라 말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보고서와 논문들은 현상의 문제점들을 증거로 제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까지를 제시하고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그 대안을 실행하여 (그러니까 복수를 하여)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결과보고서’등의 형태로 뒤에 따로 나타나게 된다.

전형적인 복수극에 생기를 불어넣는 네가지 자극제를 기억하는가 ? ‘해결사 플롯’에도 이러한 자극제가 필요한데 그 네가지 중 두가지 정도가 필요하다. 첫번째 자극제는 영화에서의 ‘주인공이 복수하기 충분할 만큼 철저히 당했는가?’와 비슷한 ‘충분히 위기를 절감했는가 ?’이다. 뭔가를 개선하기 위한 보고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청중들에게 현재의 상태가 충분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입증시키는 것이 첫번째 임무이기 때문이다. 준비한 대안(결론)이 아무리 신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위기의식’을 충분히 주입시키지 못하면 대안으로 넘어가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이 첫번째 자극제는 ‘허들’로 작용한다.

두번째 자극제는 ‘적들에게 대항할 무기가 충분히 신선해야 할것’ 즉,  ‘대안이 신선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처럼 관객이 상상하는 것을 뛰어넘어야할 필요는 없다. 앞서 제시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충분하면 된다. 이것이 두번째 허들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개선보고서의 경우 두개의 허들을 넘는 구조이며 첫번째 허들이 이유나 명분이 되고 두번째 허들은 결론이다. 이 두개의 허들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첫번째 ‘위기’라는 허들을 넘는 것이다.

현재상태가 문제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시키고 나면 대게는 대안은 쉽게 받아들여지는 반면 문제를 인식시키지 못하고 대안으로 넘어오게 되면 채택될 확률이 떨어지거나 심하게 도전을 받게 되므로 어쨋든 첫번째 허들을 넘는데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컨설턴트로서 대부분의 과제를 첫번째 허들을 넘는데, 즉 대안에 대한 충분한 명분과 이유를 만들고 입증하는데 거의 모든 노력을 집중해 왔다. 수많은 글로벌 컨설팅사들의 방법론(Methodology)들은 대부분 현재 가지고 있는 문제를 수치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Perfomance Measure 프레임웍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리의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과 보고서는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실상 청중과 경영자들을 대부분 설득해 내야 한다. 파워포인트 블루스 연재의 초반에 나오는 ‘DDOS공격에 의한 해킹 보고서와 그 대안’ 보고서 예재를 기억하는가 ? 그 보고서에서도 나는 중반부에 해킹 가능성과 예상피해규모를 경영진에 강하게 어필하는 시나리오를 세웠었다. 경영진이 그것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되면 사실상 게임은 끝나게 된다. 그러니 해결사 플롯에서 초반에 청중을 공략하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명분, 보라 얼마나 위기감을 제대로 조성했는가? 위기에 대한 대안은 저절로 따라 나온다

 

보고서의 플롯에 대해

오늘은 영화 킬빌로 전형적인 보고서의 두가지 플롯을 이끌어냈고 보고서의 ‘해결사 플롯’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였다. 영화의 플롯과 시퀀스 개념을 이용한 연재는 당분간 이어질 듯 하다. 아직 시퀀스, 서사시 플롯 등에 대해서는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플롯과 시퀀스의 개념은 파워포인트 블루스 연재 초반에 얘기를 꺼내야 순서가 맞는 것이었지만 이제서야 이들 개념을 언급하게 된 것은 나 나름대로 프레임웍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나서 이를 전달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였다.

앞서 언급한 ‘자극제’, ‘허들’의 개념은 이미 앞선 연재들에서 등장하였고 예제도 충분히 제시되고 있으니 이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추가로 하지 않았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플롯이 영화의 생명이라 서슴지 않고 말한다. 나 역시 보고서의 생명은 플롯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단하고 직관적인 플롯을 먼저 잡아놓은 다음 점차 전체의 이야기로 확장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재미없고 뒤죽박죽인 스토리를 가진 영화가 탄생하는 것을 막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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