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어느집 냉면인지 알아맞춰 보시라. 대번에 알아보는 분은 냉면의 고수이다

울 마님은 냉면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냥 있으니 먹는 정도이고 가끔 매콤한게 생각날 때 비빔냉면을 시켜먹는 정도라고나 할까 ? 그래서 결혼전 데이트를 할 때 냉면을 먹자고 하지도 않았고 집에서 야식으로 만들어 먹을 때도 거의 혼자 해먹었다. 마님은 그걸 바라보면서 ‘그걸 무슨 맛으로 먹는담?’이란 표정이었다. 하긴 집에서 간단히 해먹는 냉면에 거창하게 고명을 올릴 것 도 아닌데 비주얼이 좋을리가 없었고 그저 썰렁한 육수에 면을 말아 놓은것이 전부였으니 신라면을 좋아하는 마님이 이 냉면에 달려들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님께서 도저히 배가 출출했는지 참지 못하고 내가 혼자 먹고있는 냉면 그릇과 젓가락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한젓가락만 먹어본다고 그릇을 자기 앞에 끌어 놓았는데 잠시 한눈을 팔고 다시 보니 빈그릇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 이거 보기보다 맛있는데 면이 아주 쫄깃하고 국물도 시원하네”

당연하지. 큰 차이나팬에 물을 충분히 넣고 센불에 50초간 삶은 후 번개같이 꺼내어 얼음장같은 물로 일곱번 정도 비벼서 깨끗하게 면을 헹군 다음 같이 들어있는 육수만 부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주신 열무김치 국물을 버리지 않고 잘 익은채로 놔두었다가 그 육수에 적절히 배합해서 내놓은 그런 냉면이니 아무리 인스턴트 냉면이라고 한들 그 맛이 같을리야 없잖은가

그 후로 마님의 냉면 약탈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2인분을 할까?’하고 물어보면 번번히 자긴 냉면을 않좋아하노라고 내 등뒤로 선언을 해놓곤 텔레비젼 앞에 쟁반을 가져가면 여지없이 소말리아 해적같이 달려들어서 내 젓가락을 빼앗고 파렴치하게 국물까지 모두 마셔버린다. 오~ 세상에

아직 우리 마님은 이 포스트의 제목처럼 냉면소녀가 된 것은 아니었다. 내 기억에 최고의 냉면소녀는 대학시절 내가 있던 연구실 바로 건너편 김뭐시기 교수님 연구실에 있던 수희였다. 사실 그 녀석은 냉면소녀라기 보다는 귀신에 가까웠다. 사실 걔는 우리과 출신이 아니고 전혀 다른 화학교육과 출신이었기에 과내에서 친한 애들도 별로 없어 보였다. 나는 거리상으로는 가까웠고 같은 학번이어서 친해질 수도 있었건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서 될 수 있으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수희가 아주 못생기거나 키가 작고 뚱뚱한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오히려 우리과에 있는 십여명의 머슴애같은 여자애들에 비하면 훨씬 여성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학교에 나오면서도 화장을 거르는 법이 없었고 청바지때기나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수준이 아닌 블라우스-치마-구두의 원칙을 거의 철저하게 지켰으며 들장미 소녀 캔디에 나오는 일라이자 같이 돌돌말은 머리를 하고 다녀서 우리과 애들사이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가장 여성다운 풍모를 뽑아달라면 주저없이 뽑힐만한 그런 애였다.

그랬음에도 내가 한사코 피해다녔던 것은 그 분위가 나랑은 너무 이질감이 있어서 였나보다. 일단 그 짙은 화장품, 향수 냄새를 내가 견디지 못했다. 그런 수희를 계속 해서 마주치게 된 건 학생회관 지하 분식당에서였다. 그것도 번번히 말이다.  우습게도 그 녀석은 거의 혼자 밥을 먹으러 왔고 나또한 그래서 보고도 못본채 하는것이 힘들었던 데다가 식판을 들고 빈자리를 찾는 나한테 손까지 흔드는데 그걸 무시하고 다른데로 가야하는 변명을 하는 것도 우스워서 번번히 합석을 하고 말았다.

거기서 번번히 마주쳤던 이유는 간단했다. 분식당은 5월중순쯤부터 열무냉면을 시작하는데 이게 웬만한 분식점에서 파는 것 보다 더 맛있고 값도 5백원으로 저렴했다. 냉면돌이가 그걸 외면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보통 낮 12시 경에 가면 냉면을 대량으로 만들어 놓고 파는 바람에 거의 불어터진 냉면을 먹기 일쑤였지만 한시쯤가면 그 자리에서 면을 바로 삶는 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그 사실을 수희도 간파하고 있던 터여서 번번히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아마 내가 냉면을 먹고있을 시점에 같이 몰려다니는 애들은 바로 윗층에서 밥을 산더미처럼 퍼서 먹고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냉면은 끼니로서의 의미가 전혀없었다.

기가막혔던 것은 수희 그 녀석이 거의 삼시세끼를 분식당에서 냉면으로 때운다는 사실이었다. 배가 출출해져서 나 역시 어느날 늦은 오후에 냉면을 한 그릇 더 먹으러 갔다가 수희가 앉아서 먹고있는 걸 내가 먼저 발견하고 그대로 나와버렸었다.

며칠 후 볼일이 있어 김머시기 교수 연구실에 갔다가 수희한테 커피한잔을 얻어마시면서 냉면얘기를 꺼냈다.

“넌 무슨 냉면을 그렇게 삼시세끼 먹으러 다니냐”

“왜? 넌 냉면 않좋아해 ? 분식당 냉면 싸고 맛있지 않아 ?”

‘물론 그렇긴 하지…만’

일단 냉면 얘기가 나오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이런 저런 냉면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일단 얘기가 시작되자 내가 흥이난 나머지 나의 냉면 이야기를 모두 풀어버리고 말았고 (사실 수희한테는 그 사실을 얘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수희는 자기도 냉면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이참에 시내로 냉면을 먹으러가자고 했다.  수희 얘기를 듣고보니 그 녀석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모든 끼니를 냉면으로 해결하는 중독자였다. 이미 서울시내의 유명한 냉면집을 이슬람교도가 메카를 순례하듯 몇번을 돌았었고 집에서도 해먹으며 학교에서도 냉면만 먹는 그야말로 냉면 원리주의자 말이다.

이 정도면 냉면소녀라 할만 하잖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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