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숙제 한가지를 풀다

By | 2010-10-15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도 여전히 카세트테잎과 워크맨이 제가 음악을 든는 주요 수단이었습니다. 전 버스에 오래 앉아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건 순전히 창밖을 내다보면서 이어폰을 통해 직접 녹음한 음악을 더 오래 들을 수 있어서였죠. 학생이라 돈이 궁했기에 음악은 라디오를 통해 녹음해서 들었고 그렇게 녹음된 수십개의 테이프를 더블데크 카세트를 통해 절묘하게 편집하는 것이 저의 주특기였습니다.  황인용의 영팝스와 이종환의 밤이 디스크쇼, 전영혁의 음악세계가 단골 프로였죠. 아마 그 당시엔 초저녁부터 새벽 2시까지는 줄구장창 음악프로로 달렸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제일 즐겨 듣는 테이프는 Yes의 Machine Messiah가 녹음된 테이프 였습니다. 정말 닳도록 들었죠.

보통 음악프로에서 녹음을 할 때는 옆에 메모지도 둡니다. 노래 이름을 적어두기 위해서였죠. (아주 치밀 했었죠) DJ가 말하는걸 그대로 따라적어야 하니 가끔 영어 철자를 모르겠거나 급할때는 한글로 소리나는대로 적어버리기도 하죠. 황인용의 영팝스에서 처음 들었던 메탈리카의 Master of Puppets도 저는 ‘마스터 오브 퍼펙트’라고 따라 적었고 다른 친구들은 그게 노래가 아닌 그룹이름이라고 우겨서 며칠동안 계속 언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Jean Luc Ponty

 

가끔 녹음버튼을 누르는데 정신이 팔려 곡명을 미처 적어두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런 노래들은 한참동안 누가불렀는지, 곡명이 뭔지도 모르다가 한참 후에야 밝혀내곤 했었죠. 그런데 거의 끝까지 밝혀내지 못한 곡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 테이프에 들어있었습니다. 20년이 넘도록 어떤 곡인지 밝혀 내지 못했던 단 하나의 곡.  정말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죠. 하도 듣다보니 그 멜로디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 곡의 단서는 딱 하나, 전자 바이올린 이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있지 않았기에 더 밝혀내기가 힘들었죠.  좀 바보같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지난 20년 동안 저는 생각이 날 때마다 계속 음반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다행히 최근 몇년부터는 온라인으로 거의 모든 곡들을 30초~1분가량 들어볼 수 있어서 전자 바이올린 연주자…라는 딱지만 붙어있으면 모조리 들어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었죠.

허~ 그런데 그 미스테리가 바로 오늘 풀려버린 겁니다. 우연히 인터넷을 지나치다 쟝 룩 폰티(Jean Luc Ponty)가 바이올린을 들고있는  사진을 보게되었고 저는 즉각적으로 이 인물이 그 미스테리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닌지 확인을 하기 위해 아이튠즈 뮤직스토어에 들어가서 모든 샘플곡들을 하나하나 듣기 시작했죠. 모두 27장의 앨범이 있었습니다. 두장 정도의 앨범을 들어보고 감이 왔죠. 제가 기억하는 그 바이올린 소리의 DNA와 일치했거든요.

 

The Gift of Time : 1987

 

그러나 어이없게도 스물일곱장의 앨범중 스물 다섯장을 들었는데도 제가 찾는 그 곡이 없더란 겁니다. 참으로 기가 막혔죠. 그렇지만 이제 두장이 남았으니 마저 들어보기로 했죠. 오~! 제가 찾는 곡이 마지막으로 살펴본 앨범에 있더군요. 20년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앨범은 국내 어느곳에서도 팔지 않길래 아이튠즈 뮤직스토어를 통해 구입했습니다. 1987년 발표된 The Gift of Time이라는 앨범의 동명 타이틀 곡이었는데 타이틀 곡이면서 하필이면 맨 마지막에 포진되어 있더군요. 정말 극적이죠. 제가 찾던 곡이 27장의 앨범중 27번째 앨범의 맨 끝곡에 있다니 말입니다.

그 동안 에디 잡슨을 비롯해 바이올린을 켠다 하는 락음악계의 연주자들을 뒤지고 다녔는데 쟝 룩 폰티를 그동안 빼먹고 있었다니 매우 억울한 생각까지 듭니다. 그래도 찾았으니 다행이죠. 어떤 곡인지 직접 들어보시죠 ^^

마치 돌림노래를 부르듯,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동심원 모양으로 겹겹이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의 바이올린의 선율이 매우 몽환적으로 흐릅니다. 앙칼지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부드럽게 담을 넘는 듯한 선율이죠. 정말 여유가 넘치는 연주자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유려하게 흐르는 선율을 마지막엔 아주 깔끔하게 접어 넣는 솜씨가 일품입니다.

쟝 룩 폰티는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맙소사~ 존 매클러플린과 대니 고틀립(펫 메스니 그룹에 있던) 빌 에반스, 빌리 코햄, 얀 해머 등이 재적했던 바로 그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 말이죠.  전 그동안 커브드에어 등과 같은 락그룹들만 계속 뒤지고 다녔으니 발견을 못했던 것이 당연했죠.  어쨋든 오랜 숙제 한가지가 해결되었군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P.S – 시간이 되시면 화면 오른쪽 상단의 쟝 룩 폰티 사진을 클릭하셔서 바이올린과 관련된 포스트도 한번 구경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바이올린 연주도 들어보시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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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thoughts on “오래된 숙제 한가지를 풀다

  1. 안현석

    먼저 오랜 숙제를 푸신 것 축하합니다.^^ 저도 왠지 비슷한 기억이 나서 조금 적습니다. 어느 건물에서 들은 선율이 너무너무너무 궁금한데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해 하다가, 인터넷을 뒤져서 건반을 클릭하여 음을 사운드 파일로 추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다운받았죠. 절대음감 따위는 없는지라, 일일히 클릭해가면서 간신히 얼추 비슷한 멜로디를 만들어낸 후, 그 파일을 당시 제가 자주 가던 커뮤니티에 올리고 질문 했더니 순식간에 누군가 답을 올려 주시더라고요.(스티브 바라캇의 ‘whistler’s song’ 이었습니다…^^) 그때 저도 무척 후련하고 뿌듯(?)했던 기억이라서요.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아이폰의 soundhound 같은 앱으로 돌려보면 순식간일텐데 말이죠. 근데… 최근 에피소드 같으신데, 테잎 아직 소장하고 계셨다면 soundhound 돌려 보시지 그러셨어요. 아이튠스에 있을 정도면 금방 찾아줬을것 같은데…(물론 고생하시느라 찾은 감동은 몇배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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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테이프는 이미 10년전에 버려졌고 제 머리속엔 그 운율만 남아 있었죠. 이곡을 들어보시면 느끼시겠지만 soundhound앞에서 읖조리기도 조금 애매합니다 ^^ 인터넷 시대에 들어와서는 전자바이올린 주자로 검색해서 한명씩 찾아 나갔었죠.
      이렇게 가까이에 있던 주자일 줄은 생각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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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상민

    오랜 숙제를 푸신 분들 모두 축하합니다. 저도 비슷한 기억은 있는데 아직 미해결이네요. 6살때 어머니와 김포를 가다가 시내버스에서 들었던 곡… 기억에는 DJ왈 가수가 ‘전 영’이라고 했던 것 같고, 곡명은 기억에 없답니다. 분위기는 박인희의 ‘방랑자’풍. 어쩌면 ‘방랑자’를 불렀던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정말 비슷한 풍의 다른 노래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35년이 지났네요. 이젠 그 노래가락도 다 잊었지요. 그 가수가 ‘전 영’ 이 맞을까 기억마저 의심스럽습니다. 사실 그 즈음의 전영 앨범을 사서 확인해보면 금방 해결이 되련만, 잘 실천이 안되는군요.
    그래도, 그 오래전 여섯 살짜리의 뇌리에 남긴 진한 기억… 그게 음악의 힘이 아닐까요? ㅎㅎ
    p.s. demitrio님은 중고 LP 구입을 보통 어디서 하시는 지요? 저는 lptown.co.kr이 아는 전부라서… 좋은 사이트 있으면 알려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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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전영이라…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로군요. 말씀하신대로 마음만 먹으면 음원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듯도 합니다.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저는 LP는 더 이상 구매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최근들어서는 CD도 더 이상 구매하지 않게 되었죠.
      이 두가지를 꺼내서 듣는 일이 이젠 정말 드물어 진 것 같습니다. LP의 경우 플레이어가 고장이 나서 그에 대해 더 게을러졌죠. 아직까지 남아있는 LP 150여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망설이고 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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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상민

        LP는 저 주시면 됩니다. ㅎㅎ
        70년대 LP음원도 구할 데가 있나요? 그렇다면 그것은 놀라움!

      2. 한상민

        아, 여기서 제가 이해한 음원은 디지털 음원… LP판이야 사면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댓글을 한 번 쓰면 수정이나 삭제가 안되나 봐요…TT)

    2. demitrio Post author

      네 댓글은 수정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본인확인이 어려우니까요 LP음원은 가끔 여기저기서 보이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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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준형

    이 글을 읽고 최근 네이버에서 내놓은 ‘음악검색’ 기능을 사용해봤습니다. 3초정도 들려주니 한방에 검색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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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이에 대해서는 따로 포스팅을 해야겠습니다~ 지금까지 다양하게 곡을 인식시켜 보았는데요~ 확실히 속도가 빠른건 좋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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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Playing

    안녕하세요 ~
    축하드립니다 햐~ 노력이 대단하시네요 마지막 순간 영화로 만들어도 좋은 시나리오가 될 꺼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너무 심했나요?

    아 진짜 음악은 독특하네요 잘 듣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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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ㅎㅎ 감사합니다 제가 가끔 별거 아닌데 집착하는 버릇이 있어 그렇습니다. 쟝르를 굳이 구분하기도 애매하지만 이분은 기본적으로 재즈 DNA를 가지고있고 난해한 구석도 없지 않아 ‘바네사 메이’와 같은 스탠다드 팝 바이올린 주자들과는 색체가 좀 구별되긴 하는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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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iso

    아, 오늘 오랫만에 방문해서 폭풍 댓글질 하고 가네요. 쿄쿄
    저도 고등학생때 미친듯이 더블데크를 사용해서 나만의 녹음테이프를 만들었었답니다. 족히 50개는 넘는데, 언젠가 다 버려버렸답니다.
    저 역시 라디오 옆에 펜과 종이를 놓고 재빨리 곡명과 연주자를 적어나갔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저만의 테잎을 닳고 닳게 들어서 어떤 곡은 왠지 끝나고 나면 DJ의 소개멘트가 이어서 나와야 할 것만 같은 곡들도 있답니다.

    주파수가 잘 잡히지도 않는 오후에는 배철수의 음캠을 듣다가 끝나면 기독교 방송에서 하는 컨템포러리 뮤직을 주로 틀어주던 프로를 듣고, 자정부터 경기방송-지금은 프로그램 이름도 기억나질 않는군요-을 듣고, 새벽 2시부터는 전영혁의 음악세계(영 제 취향이 아닌 곡이 나올땐 배유정의 영화음악을 들었습니다), 끝나고 나서 깊은 밤엔 락이 좋다, 아. 한동안 자정에 외압으로 프로그램이 오래가진 못했지만 기독교 방송의 이단아와 같았던 락관련 프로그램(이름이 역시 기억나질 않네요)을 듣기도 했군요. 그리고 낮 시간엔 AFKN을 주구장창 들었답니다.

    저는 황인용 아저씨가 DJ하던 세대는 아닌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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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ㅋㅋ 원래 어쩌다 한번 말을 섞었을때 폭풍질을 하는거죠뭐..전영혁, 배철수, 배유정(ㅎㅎ)까지는 저도 잘 압니다. 그 이전엔 김세원이었는데 그걸 얼마나 들었는지 영화음악 퀴즈라도 나가면 무조건 1등을 할것 같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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