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 결승전 : 실력, 흐름, 멘탈

By | 2009-03-25

어제 정말 피말리는 연장승부를 통해 지긴 했지만 한국팀이 모든걸 쏟아낸 좋은 승부였다. 일본과의 수준차이도 가늠해 볼 수 있는 그런 게임, 어제의 전력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막상 지고나니 아쉽고 허탈하다.
야구는 실력, 흐름, 멘탈의 경기인것은 분명하다. 만약 내가 일본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어제 경기를 냉철하게 따져본다면 일본은 질만한 경기였다. 1회부터 수많은 진루를 거듭하면서 안타를 무려 15개나 때려냈지만 정작 득점 찬스에서는 병살타와 번트 실패 등으로 모든 기회를 무산시켰다.  일본팀은 어제 무려 14개의 잔루를 기록했다.  만약 고영민의 에러가 나오지 않았고 0:0인 상황에서 추신수에게 선제 홈런을 맞았더라면 경기의 흐름은 급격히 바뀔 수 있었다.

야구가 흐름의 경기이다보니 양팀의 실력이 대등했더라면 일본이 잔루 14개를 남기고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제 경기중의 하라감독의 작전은 거의 모두 실패했다. 번트나 히트앤드런 등 모든 작전이 말이다. 봉중근에 강했던 조지마를 4번 타자로 배치한 것도 결과적으로는 참담했고 마지막에 다르빗슈를 마무리로 올린것도 9회 화끈한 불쇼로 돌아왔다.
경기흐름을 저해하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작전미스가 있었음에도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타자와 투수의 개인적인 역량들이 우수한 탓이었다.

지난 쿠바전부터 재미를 보기 시작한 단타위주의 타격은 비록 많은 땅볼과 잔루를 양산하기는 했지만 상대팀을 조금씩 침몰시키기에 충분했고 마운드에 선 이와쿠마는 나이답지 않게 정말 안정적인 운영과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기막힌 로케이션으로 4회 2사까지 한국타자들을 완전히 농락했다.
0:0, 1:1의 스코어는 대등했지만 보는 사람은 누구나 느꼈듯이 공격과 수비에서 일본에 열세를 면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즉, 일본은 평소라면 열번을 지고도 남을 나쁜 경기의 흐름을 오로지 실력하나로 극복해낸 것이다.
멘탈면에서는 한국팀이 정말 강했다. 초반부터 거의 침몰 당할것 같이 느껴졌던 경기를 기어이 9회말에 다르빗슈를 두들겨 동점까지 몰고가는 것을 보고 정말 소름이 끼쳤다.

어제 우리 투수들은 봉중근-류현진-임창용 할것 없이 평소보다는 좋지 않은 컨디션이었는데 김인식 감독의 투수교체 타이밍이 ‘조금 너무하다’싶을 정도로 늦었던 이유도 모두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였던것 같다.  정현욱은 비록 실점하기는 했으나 그 역시 3.1이닝이나 소화해 내는 바람에 막판에 구위가 떨어져 버린것 같다. 
임창용 역시 2이닝동안 47개의 공을 던졌다.  정현욱이나 임창용을 각각 2, 1이닝씩으로 끊고 그 사이사이에 오승환, 정대현 등을 투입했으면 …하는 바램이었는데 어제 그들은 그리 컨디션이 좋지 않았나 보다.

한국의 선수층이 얇다는건 이런곳에서 나타났다.  믿고 올릴만한 투수들이 없어 교체타이밍을 빨리 가져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9회말 공격을 마치고 10회 수비에 들어가기 앞서서는 박경완, 김태균, 박기혁을 대신한 강민호, 이택근, 최정에 대한 수비를 걱정해야 했다.
대표팀의 선발라인업과 후보군간의 기량차이가 있으면 생기는 현상이다. 이 부분은 일본팀과 대조가 된다. 일본의 경우 무라타가 부상으로 중도하차 했어도 팀전력에 티끌만큼도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

그래도 WBC 1회 대회나 이전에 비해서는 특정선수에 대한 집중도가 여러선수로 분산되어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갈길이 멀다. 국내 리그의 베스트 멤버가 총출동했는데도 불구, 박진만의 부상을 아쉬워해야 했고, 박경완을 대체할 수 있는 공격형 포수 또한 그리웠다.  이 부분은 계속 좋은 선수들이 양산되어 국내리그의 선수층이 두터워져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앞으로는 포지션별로 누구를 선정해야 할지 후보자들이 많아 고민하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일본은 이제 한국을 만나면 무조건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하라 감독의 신중한 태도는 정말 좋았다. 대표팀내의 이치로와 같은 여러 선수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고 상대팀을 존중하는 (적어도 말로는) 자세가 일본의 성적을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아마 하라 개인적으로는 재팬시리즈를 재패하는 것이 다음 목표가 되지 않을 까 생각한다.
하라 감독 개인적으로는 어제 천당과 지옥이 백지장 한장 차이였으리라. 만약 한국에 패했다면 그 이전에 벌어진 작전미스와 14개의 잔루, 다르빗슈의 투입시기 등등에 대해 집중성토를 당했을 것이고 호화멤버의 요미우리를 가지고도 2년연속 재팬시리즈에서 패퇴한것 까지 묶어 일본의 냄비언론에게 십자포화를 맞고 장렬하게 침몰하지 않았을 까 싶다.

사실 이번대회 초반부터 한국팀은 꼬이기 시작했다. 믿었던 원투펀치 김광현과 류현진의 컨디션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빈 공백을 윤석민과 봉중근으로 메꿀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운 수확이다. 계속 선수층이 넓어지고 있다는 증거아닌가.

이번 대회를 통해 눈여겨 볼만한 우리선수들의 성장 포인트로는…

1위 김태균…안방 거포가 아닌 국제거포로 거듭난 기회..상대팀에 공포를 안겨주다
2위 윤석민…스스로의 볼이 국제적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게되다.  정말 대단…
3위 김현수..장효조 이후 국내리그를 재패할 최고의 교타자..특1급 투수들과도 당당히 맞짱
4위 봉중근…자신의 볼에 자신감을 갖다
5위 이범호…슬러거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다. 완전 자신감을 찾았던 무대
6위 정현욱…한국팀 최고의 파이어볼러였다. 시원시원~~~
7위 이용규…팀분위기를 이끌다. 상대팀에는 완전 눈엣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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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oughts on “WBC 결승전 : 실력, 흐름, 멘탈

  1. 깊고푸른

    정말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경기였습니다.

    아쉬움
    1. 9회말 3-3 동점상황에서 고영민의 삼진아웃- 다르빗슈가 많이 흔들리는 상태였는데..삼진아웃

    2. 10회초 임창용의 이치로와 정면대결- 고의사구로 1루 채워서 했더라면, 임창용에게 파울로 계속 도발시킨 이치로.그후 정면 대결

    3. 3회 고영민의 에러- 이것이 빌미가 되어 첫실점으로 이루어졌죠. Demitrio님 말씀대로 선취점을 우리가 먼저 얻었다면…

    며칠은 두고 두고 머리속을 맬돌것 같아요.
    너무 아쉽워 경기 끝나고 몸이 상태가 급격히 안좋아 졌어요^^
    하얗게 불태운느낌. 재가 된 느낌이였습니다.

    그리고 이치로에게 극적인 장면을 제공한것 같아 그것도 안타까움으로 남네요.

    이겼더라면 많은사람들이 참좋아 했을텐데…월드컵의 4강처럼…

    여튼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대한민국 선수단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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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june333

      고영민이 두번이나 아쉬움에 등장하는게 아쉽네요,,
      고영민의 화인플레이 아니었으면 연장에도 못 갔을 겁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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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demitrio

      네 kjune333님의 말대로 고영민의 결정적인 선방도 있었기에 저 역시 고영민을 탓하지 못하겠더군요. 어제 전체 게임의 흐름을 감안한다면 패배의 책임을 특정 몇몇에게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못한것 같습니다.
      다만 저 역시 냄비근성이 깔려있어서 그런지 아쉬웠던건 사실입니다만…
      어제 다르빗슈는 정말 모든걸 짜내듯이 던지더군요.
      정말 ‘여기서 무너지면 난 끝장’이라는 모드로 말이죠. 그 역시 일본내에서는 건방을 떨어도 되는 스타플레이어지만 이런 큰 대회의 결승에서 마무리로 선다는 부담이 엄청났겠죠.

      이와쿠마를 제외하면 다음번에 다르빗슈를 만나도 좋은 승부가 될것 같습니다. 어쨋든 다르빗슈가 나오면 계속 우리 타자들이 공략을 해댔으니까요.

      전 이번 결과가 만족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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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재능세공사

    나도 포스팅을 할려다가 이래저래 군더더기 하나 더 붙이는 것 같아서 포기했음.. 나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투수교체 타이밍을 늦게 가져가는 것에 대해 돌아버릴뻔 했는데 니 말이 맞을듯.. 다만 결과적으로 운좋게 최소실점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많았다만 일찌감치 승부가 나버릴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십년감수했었음..

    고영민은 여러차례 언급이 되었다만 나로서는 이범호의 2루타 이후에 빚맞은 타구가 정말 아슬아슬하게 파울이 되는 장면이 두고두고 아쉽더만.. 그게 행운의 인정 2루타가 되었다면 경기흐름을 완전히 가져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임창용의 마지막 실투는 김인식 감독의 거르라는 사인이 있었다고 나중에 밝혀졌는데.. 허구연 아저씨가 목이 메이도록 좋은 볼 주면 안된다고 외칠 정도로 당연히 최대한 나쁜 볼로 꼬셔야 했는데.. 이치로가 몇개의 좋은 유인구를 파울로 걷어내는게 일단 컸고 강민호 역시 마지막 포구자세를 보면 승부사인을 냈다고 봄. 임창용은 직구구속을 최대화하며 졸라게 던졌지만 다른 변화구가 전혀 제구가 안되니 일본타자들은 딱 하나만 노리면 될 정도였음. 라이징패스트볼 하나가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더만..

    그 이전에도 9회초에 이치로가 작정하고 노려친 볼이 홈런이 되는줄 알고 얼마나 기겁을 했던지.. 여러모로 가슴 졸이고 안도하다가 진빠진 경기였음.. 그래도 니 말대로 정말 우리 애들 끈질기더만.. 미국애들까지 칭찬해 준 수비력 하나갖고 버텼다고 볼 수 밖에.. 어떤 컬럼을 보니 이제 일본놈들하고 이정도 수준에서 붙을 기회가 앞으로 없을지도 모른다는 한탄하던데.. 정말 그럴지도..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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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아마 같은시간에 일본에서 TV를 보고있었을 일본애들은 9회말 동점순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게야. 공포심으로 말이지.
      실력차이로도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는 그 끝이 없는 투지같은거에 완전히 질려서 말이지. 사실 어제 TV를 보면서 일본팀도 대단했다고 생각한 것이 작전실패나 동점타로 김빠지는 장면이 매회 나왔는데도 다음회 공격에서 또 때려내고 나가고 뛰고 하더구만…
      우리애들이 정말 독종인것은 사실이지만 어제는 일본도 그랬던것 같아.

      예전을 기억해 보라구…올림픽이나 1회 WBC때 일본은 한번 김이 빠지면 무기력해 지거나 꼭 실책을 범하곤 했는데 어제만은 그렇지 않았거든.
      심지어 지난 3차전 4:1로 승리할 때도 그 녀석들은 예전과 같이 어리둥절 해하고 실수를 남발하고 했었는데 정말 어제만은 그러지 않았어.

      덕아웃에서 하라와 코치진이 계속 용기를 내도록 격려하고 예전과 달리 멤버끼리도 다시 해보자는 마음이 강했던 게지. 만약 어제같은 상황에서 덕아웃에 하라 대신 호시노가 들어있었더라면 분명 한번쯤은 덕아웃을 뛰쳐나와서 항의도 하고 눈쌀도 찌푸리고 횡설수설 하면서 덕아웃 분위기를 스스로 패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을 게야.

      그래서 이번엔 하라가 MVP가 아닐까 싶어. 승리후 인터뷰에서도 여전히 신사적이더군. 하라는 자신이 원했던걸 얻을 자격이 있다고 보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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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염상준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잘 지내시죠?

    며칠이나 지난 얘기지만 야구 시즌만 기다리며 겨울을 보내는 저같은 사람은
    이번 봄이 보너스라도 받은 느낌이었어요.

    ‘외국언론이 한국야구를 어떻게 보는지’ 보다는
    어떤 점이 더 나은지.. 어떤 점이 모자라는지를 냉정하게 볼 수 있어서
    좋기도 했구요 ㅎㅎ

    결승전을 보면서..

    한회한회 진행되면서 교체카드를 소진해가는 우리와..
    남아있는 카드 중 어느 패를 꺼낼지 고민하는 상대와..
    딱 그 만큼이 두 나라의 실력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

    곧 책을 내신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립니다. (대단하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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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응 그게 실력차였지 … 책이 나오긴 나와야 할텐데 계속 작업이 늦어지고 있음. 내탓이기도 하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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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kim TE HI

    고영민이 다르빗슈에게 삼진당할때는 어쩔수없을만큼 구위가 대단했습니다
    재방송을 봐도 154km의 공끝이 살아꿈틀대는 강속구를 스트라잌존에서 완벽히 제구되어 낮게 높게 던져 투스트라잌을 만들고는, 또한번 가운데 높은 강속구를 던져 변화구가 올까 긴장한 고영민이 가까스로 커트해낸뒤, 4구째 스트라잌존 가운데로 오다가 밖으로 흘러버리는 130km대의 슬라이더를 던져버리니 고영민으로서는 헛스윙 삼진될수밖에 없었던거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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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앞선 이범호 타석때는 바깥쪽으로 제대로 제구된 볼을 이범호가 그대로 노려쳤더랬죠. 사실 패턴은 고영민에게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노리고 있지 않으면 쳐낼 수 없는 혼신의 역투였죠.
      다르빗슈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을 겁니다.
      사실 이범호 이전에 추신수가 경기를 끝장내버리길 갈구했었습니다. 자기손으로 직접 병역문제를 한방에 때려잡을 기회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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