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걷기

By | 2008-03-13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감히 자신하건데 그 당시에 걷는속도로 나를 따를자는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오로지 경보선수들만이 나를 능가할 수 있으면 있었지 그외의 보통사람들은 절대로 나같이 걸을 수 없다고 매일 확신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친구들과 거의 매일같이 어울려 술을 마셨다.  우리집은 대대로 술을 못마시기로 정평이 나있는 집이어서 제사를 위해 따놓은 백화수복 한병으로도 집안사람 여나무명쯤은 완전히 취하게 할수도 있었다.    집안내력이었는지 나 역시 술에 약했지만 어쨋든 술자리에는 거의 매일 어울려 다녔다.
오후 5시에 시작하건 7시에 시작하건 끝나는 시간은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막차를 걱정하며 일어서야 했고 학교앞에서 출발하는 막차에 몸을 싣고 신촌로터리에 도착하면 언제나 집으로 가는 버스는 끊겨 있었다.

나의 걷기가 거기서부터 시작된것 같다.   어떤때는 정말 돈이 하나도 없어 걷기도 했다. 처음엔 터벅터벅 걸어서 신촌에서 집까지 왔었는데 몇번 그렇게하다 보니 웬만큼 걸어서 올수 있는 거리가 된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굳이 버스가 끊기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대학때는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혼자서 걸어다녀야했다.  가끔은 동네친구들과 신촌에서 마시다가 비가 억수같이 오는날 5-6명이 단체로 집까지 뛰어가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이라 같이 뛸만 했다.
누가 뛰자고 해서 뛰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집까지 뛰어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반사적으로 뛰기 시작했는데 너무 비가 많이 와서 집에 도착했을 무렵엔 가방속에 들어있던 책까지도 모두 젖은 후였다.

비가 내릴때도 옷이 젖지만 한여름밤에 걷는 것도 그랬다.   점점 빠르게 걷다보니 한여름밤에도 다들 더워서 집밖에 평상을 펴놓고 나와 모기를 간신히 쫓으며 잠을 청하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나역시 땀으로 온몸을 적신채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내 걷는 속도를 재보기로 하고 신촌문고 앞을 출발하여 집문앞까지 측정을 해보니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40분가까이가 걸린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걸을때마다 기록을 단축했다.   걸을때마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몸상태는 들쭉날쭉했지만 결국 기록은 항상 단축이 되었다.

신촌문고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려면 많은 정거장을 거쳐야 했다.  신촌문고-산울림소극장-홍대정문입구-극동방송국-상수동-합정동-합정동로터리-남경호텔-십자약국-제일약국.. 줄잡아 거의 열정거장이니 꽤나 먼거리였고 평상시에는 버스를 타고 15분정도 걸렸다.

이정도의 거리를 난 거의 30분 정도에 주파해내고 있었다.  물론 난 버스가 가지 못하는 지름길로 갈 수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내가 마의 30분대를 돌파한 것이 방위소집이 끝나고 1년정도가 지나서였나보다.   그때 나의 걸음걸이는 거의 평상인이라고 할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보폭은 1미터가 훨씬 넘었고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거리의 행인들은 폭주족이 보통차들을 제끼고 거리를 요란하게 달리듯이 추월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때문에 어쩌다 한번 소개팅이라도 나가 여학생과 차를 한잔 마시고 거리로 나서면 언제나 ‘걸음이 매우 빠르시네요’하는 소리를 들어야했고 나는 절반이하로 속도를 낮춰걸어야 했다.

몇년전부터 수영을 배우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걷는것 역시 몸의 밸런스가 너무 중요한것 같다.  걷는것은 매일 하는 일인데도 예전보다 걷는양이 줄다보니 최전성기때의 그 밸런스가 나오지 않는것 같다.  내가 그렇게 빨리 걸어다녔을 당시에는 그렇게 빨리 걷기위해 추가적인 몸의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을까 ?    그건 아닌것 같았다.  내가 기록을 단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추가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해서 가속한 것이 아니라 온몸의 동작과 밸런스가 점차 좋아져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난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덜들게 된 것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서울역에서 시청쪽으로 걸어가면서 순간적으로 예전의 그 밸런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폭도, 밸런스도 내 팔의 움직임도 참으로 어색했다.   속도도 안나고 키크고 젊은 백팩을 짊어진 녀석들이 추월하는데도 속도를 올릴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예전의 그 신촌에서 수년간 벌어졌던 나 자신만의 경주를 떠올리고는 혼자서 킬킬거리면서 목적지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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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oughts on “빠르게 걷기

  1. 헤아림

    멋진 한편의 수필이네요. 문체가 참 간결 하면서도 맛깔납니다. 재주도 많으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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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 감사합니다~ 점심은 안먹고 갑자기 생각나서 주욱 휘갈겨쓴건데 … 사실 지나고 보면 그런글들이 더 정감이 갈때가 많은것 같습니다. 근데 혹시 제가 아는 분이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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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기찬

    난 왜 한번도 니가 걸음이 빠르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을까?
    이미 무공을 상실한 이후에 주로 봐서 그런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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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 우리가 장시간 같이 걸었던 일이 없기 때문이라오. 그대신 장시간 같이 서있었던 적은 많았었지. 게다가 무공을 많이 상실했단 말도 맞는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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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효준,효재아빠

    학교 다닐 때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싶은 것들두 젊음의 객기였는지 몰라도 쉽게 하고 했었는데..젊음이 좋은걸까? ㅋㅋ
    아직은 마음은 20대 그대로인 것 같은데..

    회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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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그런짓이야 못하겠냐…
      다만 예전보다 주위의 눈을 더 의식한다는 점이 다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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