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 키드

By | 2022-02-21

홍익대학교 교문앞에서 경사진 길을 직진해 내려오면 사거리직전 골목길 초입에 리치몬드 제과점이 있었고 사거리 건너편엔 청기와주유소가 있었다.  계속 직진하면 거리가 한산해 지면서 야트막한 2,3층짜리 빌딩들이 나오고 길은 상암동까지 뻗어 있었는데 좌우로 성미산과 경성고등학교로 가는 사거리가 나오기전, 서교시장으로 가는 사거리 사이쯤 오른편 구석에 극장건물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곳에 청원극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미 이 극장은 몇 년전 ‘서마탱 사태'(서울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일으킨 곳이어서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서마탱은 지금껏 나온 한국 애로영화 중에서도 가장 수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였음에도 이를 청원극장에서 몰래 보고 온 경성고 학생들이 많았다.  영화를 보고온 이들은 당연히 급우들에게 영화장면을 묘사하며 자랑을 했고 군침을 흘리며 듣던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영화를 보러가겠노라고 결의를 다지게 된다. 

학생관객은 늘어났고 극장 주인 아주머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이러한 첩보가 학생과에 접수되면서 게쉬타포와 킬러가 (둘 다 별명, 체육선생) 여러 선생들과 극장과 인근 당구장을 동시에 기습, 다수의 학생들을 검거하는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나를 비롯한 동도중학교 학생들은 한두달에 한 번씩 영화를 단체관람하던 습관이 남아있어 정기적인 극장출입이 필요했다.  그들은 단체관람을 통해 엑스칼리버, 남북취권, 007 문레이커 등을 흥미있게 봐왔던 추억이 있었기에  학교에서 청원극장 출입을 금지하자 금단증세를 일으키거나 더 멀리 신영극장, 대흥극장으로 진출했다.

난 재수생 시절부터 청원극장에 본격출입하기 시작했다.  보름에서 한 달 주기로 동시상영 프로가 바뀔 때마다 어떤 영화든 개의치 않고 항상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가서 4시간씩 앉아있다 오곤 했다.  상영프로는 동네 담벼락 곳곳에 선전 포스터가 부지런하게 붙어 어딜 찾아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고있었다.  어찌나 죽돌이 같이 뻔질나게 극장을 출입했는지 영사기를 돌리는 주인 아저씨와 매표소/매점을 담당하는 주인 아주머니까지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보통은 동네 친구들하고 같이 갔지만 녀석들이 생각이 없다고 하면 일요일 초저녁쯤 나 혼자 걸어가 마지막회를 보고 주인아주머니와 같이 건물을 나서는게 일상이었다.  내가 본 영화편수는 1년에 4~50편을 넘어서 (동시상영이라 가능했다) 수 년간 웬만한 개봉영화는 모조리 섭렵했으니 헐리우드 키드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청원극장 주인 부부는 두 분 다 무뚝뚝했다. 가끔씩 딸까지 동원되어 가족만으로 극장을 운영했는데 수 년간 출입했지만 말은 거의 나눈적이 없어 이 분들이 과연 단골손님인 나를 기억하기나 할까 싶었다. 특히 영사실의 주인 아저씨는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어 더욱 그랬다.  이런 삼류극장에서도 이벤트가 있었는데 설날과 추석특선 프로가 메인 이벤트였다.  보통은 히트작 하나와 졸작 하나를 묶어 상영하는게 보통이지만 명절엔 히트작 두 편을 편성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몰렸다. 

어느날 시고니위버의 에일리언 2를 마지막회에 역시 혼자서 보고 나오는데(진짜 재미있었다)  영사실에서 아저씨가 나오더니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학생, 이번 추석엔 어떤 프로를 걸어야 할까 아이디어 좀 줘요”

때는 아직 초여름이었다. 아저씨 말로는 지금부터 그 결정을 해야 필름릴을 조기에 확보할 수 있어 빨리 결정할 수록 좋다는 얘기였다.  지금 개봉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경쟁이 치열해 그때 받아올 수있을지 장담할 수 없고 가격이 비싸 가급적 상영했던 영화들중 대작을 골라 두 편을 편성한다고 했다. 

“사장님, 에일리언 1,2를 연속 상영하세요.  에일리언 1의 끝장면은 에일리언 2 첫장면하고 막바로 연결되거든요. 사장님은 기술이 좋으니까 1의 자막이 올라가기전에 2로 연결해 상영하실 수 있을거 같아요.  에일리언 팬들로선 이미 봤던 영화지만 1,2가 붙어서 상영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사건이구요!”

사장님은 숙고하는 모습이더니 의견 고맙다며 내 어깨를 툭치고 다시 영사실로 들어가셨다.  그해 추석을 앞두고 동네 벽보엔 에일리언 세계최초 1,2편 연속 상영 포스터가 붙었다.  푸하하 세계최초라니..맞는 얘기긴 하지.  영사실의 사장님은 나의 기대대로 에일리언 1,2를 마치 하나의 영화처럼 연결해내셨다. 

‘특전 U보트’는 평소 보려고 벼르던 영화였는데 동네 포스터에 잠수함 사진을 발견하고 너무 기뻐 그주말 마지막회에 평소처럼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청원극장으로 갔다. 그 앞 시간에 상영했던 영화가 무엇인지 기억은 안나는데 어쨋든 그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회인 특전 U보트 시간이 다가오자 극장안의 손님이 모두 빠져나가  매점을 지키는 주인아줌마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  

“영화 볼거죠?”

주인아줌마가 물었다.

“네 당연하죠. 칸쵸랑 콜라하나 주세요”

“그리고…저어 사장님…아무도 없어서 그런데….괜찮으시면…저 이 영화….담배피우면서 봐도 될까요?….평소 그래보고 싶었거든요…로버트 드니로 흉내도 내보구요..”

주인 아줌마는 말없이 칸쵸, 콜라 그리고 재떨이로 쓸 깡통을 하나 내주셨다.  내 생애 최초로 혼자 영화를 보면서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해주신 사장내외분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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