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냉면

By | 2022-01-09

망원1,2동, 합정동, 성산동, 서교동의 천주교 신자들은 그 시기에 모두 절두산성당에 다녔다. 난 국민학교에 다니던 6년 내내 이 성당에 다녔다. 절두산 성당은 주택가에서 멀찌기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부터(현재의 한마음어린이 공원 바로앞 하드코어키친 자리가 우리집이었다) 성당까지 도보로 적어도 30분은 걸어가야 했다.  망원 2동에 사는 녀석들은 걷기엔 좀 멀어 합정동 로터리까지 버스를 타고 나와 성당앞 굴다리까지 이어지는 곧은 길을 걸어들어갔다.  그 길은 넓고 한산했으나 일요일 아침이면 오전 미사를 보러가는 사람들로 긴 행렬을 이루었다.  어린이 미사는 오전 9시여서 나와 형이 먼저 집을 나서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10시나 11시 대미사를 보러 우리보다 조금 늦게 집을 나섰다. 

 어차피 주일학교가 끝나고 나면 거의 점심시간 언저리였으므로 집에 갈땐 네 가족이 함께 돌아갈 수 있었다.  절두산 성당은 네모반듯한 재미없는 건물과는 달랐다. 높은 언덕에 기대어 지어진 건물이라 맨꼭대기에 성당과 앞마당이 있었으며 그 아래에 사제관과 사무실, 주일학교 교실이 맨 아래에 있는 재미있는 구조였다.  우리는 11시미사가 끝날때까지 성당 각 층을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거나 땅바닥에서 할 수 있는 별별 놀이를 하고 있다가 성당문이 열리며 미사가 끝난 어른들이 성당앞 광장에 쏟아져 나오면 각자의 부모님을 찾아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절두산 성당은 우리의 정말 좋은 놀이터였다. 하지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자 성당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신자수가 늘어나 성당을 몇 개로 분리한다는 소문이었다. 설마했지만 곧 주임신부님이 강론시간에 그에 대해 말씀하셨다. 서교동과 성산동 성당이 신설되고 절두산 성당은 본당의 역할대신 기념성당으로 남는 다는 내용이었다. 

거의 남북분단의 현장이었다. 서교동에 사는 친구들은 이제 일요일에 성당에서 만날 수가 없게된 것이었다. 우리들은 부모님에게 불만을 터뜨렸지만 이미 성산동과 서교동에 성당부지가 마련되어 되돌릴 수가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성당친구의 절반은 그 때 헤어졌다.  우리가족의 교적은 절두산에서 새로생긴 성산성당으로 옮겨졌다.

기가막힌건 땅만 사놓고 건물은 없다는거였다.  초대 주임신부님은 혈혈단신으로 부임해 천막을 지어 첫 미사를 봉헌했고 그 때부터 건물을 위한 모금활동을 게시했다.  그렇게 성당 지을 돈이 마련될때까지 천막생활을 해야하는 거였다.  이쯤되면 성당에 가기 싫어질 수 밖에.  이듬해 봄 성당 신자들의 모임인 청년레지오회에서 성당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바자회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제안은 원칙적으로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했고 책과 옷 등의 물품을 기증받아  행사를 이틀간 진행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행사기간중 먹거리를 파는 천막도 4~5군데쯤 만들자고 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많은 분들이 음식솜씨가 좋은 우리 엄마가 한 코너 정도를 맡아주었으면 했다. 엄마는  몇 번을 고사하다 결국 한코너를 맡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느날 우리집으로 일단의 성당아줌마들이 모여들었다.  이미 다른쪽에선 김밥과 떡볶이, 파전과 빈대떡 등 잡다한 먹거리를 선점했던 모양이었다. 

안방에선 메뉴에 대한 격렬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좌장격인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안돼요, 천막에선 그렇게 여러가지 음식을 내놓을 순 없어요. 여러가지 반찬을 주는 것도 어렵구요”

“비빔밥은요?”

“비빔밥도 준비할게 많아요. 더 단순하게 갑시다. 냉면 단일 메뉴로 갑시다”

“냉면? 냉면!”

“냉면!!!”

그렇게 메뉴는 엄마가 제안한 냉면으로 결정났다.  아줌마들이 모두 돌아가고 내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엄마, 비빔냉면할거야?”

“아니 물냉면”

“우리한텐 그런 물냉면 해준 적이 없잖아 어떡하려구?”

“니 엄마 실력을 우습게 보지마. 이번주에 시험삼아 해줄테니 먹어봐”

엄마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주중에 장을 봐서 육수를 낸 다음 냉면을 위한 물김치를 담궜다.  그 결과 주말에 우리 형제는 엄마가 정식으로 해준 첫 물냉면을 먹어볼 수 있었다. 고기육수와 물김치국물을 반쯤 섞어 육수를 내고 시장에서 파는 거무스름한 빛깔의 한올한올 뜯는 냉면으로 사리를 만들어 고기와 물김치의 무우를 얇게 썰어 고명을 올렸다.  외삼촌 집에서 먹었던 그런 물냉면을 생각했었는데 그 모양새와는 완전히 달랐다. 외삼촌집 신정동 냉면엔 빨간 양념장이 크게 한 숟가락 정도 들어가 국물을 빨갛게 만들었는데 엄마의 냉면은 애당초 그런게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냉면은 또 그대로의 맛이 있었다. 

“합격이야~~!”, “나도 합격” 형과 내가 각각 첫소감을 말했다.

“그래? 그럼 이렇게 가자”

망원동 57번지는 동네에서도 빈민촌에 해당했다.  한 집에 몇 가구가 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살았고 골목도 좁았으며 동네골목엔 공동화장실도 있었다.  구멍가게들과 가내수공업을 하는 집도 많아서 57번지 골목을 돌아다니면 흥미로웠다. 우리 형제는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하러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골목에서 보냈고 친구들도 대부분 여기에 있었다.  신부님이 사제관 대용으로 사용하는 가게집2층 사거리 건너에 벽돌공장이 있었고 그 바로 뒤에 매우 흥미로운 냉면공장이 있었다. 담벼락도 없는 마당에 면을 널어놓기 위한 장대구조물이 있었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대부분 냉면이 블라인드처럼 널려있었다.   우리는 술래잡기를 하거나 다방구를 하며 때로 이 냉면공장 앞마당으로 피신하기도 했는데 널어놓은 냉면 사이를 비집고 뛰어다니는 맛이 좋아서였다. 

물론 냉면공장 아저씨는 그걸 볼때마다 “야 이놈들아~ 냉면~~”하고 우리를 쫓아냈지만 우리는 파리떼처럼 다시 거기로 모여들곤 했다. 그런데 이 냉면은 내가 자주 먹는 시장에서 사온 면과는 색깔이 좀 달랐다. 자주 보던 냉면은 요즘의 칡냉면같이 약간 짙은 색이었는데 여기 널려있는 냉면은 색이 상당히 밝았다.  포장된 냉면 투명비닐 겉봉을 보니 ‘버들표냉면’이라 되어 있었다.

“엄마, 우리동네 버들표냉면으로 해보면 어때? 내 생각엔 맛있을거 같아” 

“그걸 어디서 파는데?”

“가까워 벽돌공장 뒤”

“거기에 냉면가게가 있다고?”

“아니 공장이야”

엄마를 데리고 그 길로 버들냉면 공장으로 갔다. 공장 아저씨는 골치덩이인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넌?” 하고 한 마디를 떼다 우리 엄마를 보고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엄마는 마당에 널린 면들을 보더니 아저씨와 상의를 하고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보니 공장아저씨가 엄마를 향해 연신 절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바자회때 선보일 냉면 공정의 90%는 우리집에서 거의 다 준비가 진행중이었다. 냉면조에 소속된 아줌마들이  매일 우리집에 드나들며 엄마의 지시대로 식자재를 사날랐고 김치와 육수가 전날까지 준비되었다.  엄마는 하루에 100인분 정도 준비하면 되지 않나 예상했다.   엄마에겐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육수를 얼음처럼 시원하게 가져가야 하는데 육수를 만든 들통이 너무 커서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나에게 아이디어가 있었다. 

“엄마 육수를 진하게 우려내고 거기에 얼음가게에서 벽돌만한 얼음을 넣어요. 그리고 얼음을 조금씩 깨서 손님 육수를 부을때 넣어주는거야”

엄마는 그 아이디어에 더해 스태인레스 대접 여러개에 육수를 진짜로 10여개쯤 얼려 투척했다. 그리고 얼음가게에 크리스탈같이 투명한 얼음을 주문했다.  성당천막으로 짐자전거를 탄 얼음집 아저씨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다듬이돌 만한 얼음을 가져왔다.  우리들은 딱지치기를 하면서 얼음집 아저씨들이 톱으로 얼음을 써는 장면을 수도 없이 구경해 왔기에 그리 신기하진 않았다.  아저씨는 큼직하게 얼음을 깨주셨고 그걸 첨벙첨벙 육수에 투척했다.  시장에서 먹는 냉면같이 손님에게 서빙할 땐 커다란 식가위 손잡이로 툭툭치면 얼음은 몇 조각으로 갈라진다. 그 얼음들은 집에서 얼리는 얼음과 다르게 완전히 투명한 크리스탈 같아서 마지막에 얼음만 남아도 남기지 않고 집에 넣어 녹여먹곤했다.

야심차게 준비한 바자회의 막이 올랐다.  대부분의 천막음식점은 한 시간쯤 후인 11시쯤 문을 열 것이다.  엄마와 냉면집 아줌마들은 혹시라도 냉면이 팔리지 않을까봐 시험을 앞둔 수험생같이 발을 동동 굴렀다. 왼쪽집은 떡볶이와 오뎅을 신나게 만들고 있었고  오른쪽집은 파전과 수육, 막걸리같은걸 파는 모양이었다.  오픈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우리를 가운데 두고 양쪽집으로 몰렸다. 일단 냄새부터 사람들의 끌었으니 말이다.  엄마와 아줌마들의 걱정이 현실화되나 싶었는데 우리쪽이 비어있는걸 보고 수녀님들과 신부님이 오셨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에 앉았다. 

손님이래봤자 거의 다 아는 성당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냉면을 받아 육수를 들이키자 마자 등짝을 한 대 맞은듯 꿈틀거렸다.  

“맛있네~! 냉면”

처음만 좀 힘들었다뿐이지 그 다음부턴 걷잡을 수 없었다.  냉면의 소문은 바자회를 휩쓸었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이미 절반이상이 팔려나간 모양이었다.  엄마가 다급하게 나와 형을 불렀다. 

“안되겠다. 내일 쓸 육수도 집에서 가져와야 겠어 그거 자전거 뒤에 싣고 올 수 있겠니?”

“자전거를 끌고 뒤에서 누가 잡고 오면 돼요”

“그럼 얼른 다녀와라.” 

집을 몇 번 들락날락하며 내일 팔 재료들을 몽땅 자전거 짐받이에 얹고 끌고 갔다.  도착하니 이미 버들냉면 공장 아저씨와 얼음공장 아저씨가 와있었고 정말 감당이 안될 정도로 냉면이 팔려나갔다.  이미 맛없다고 결론지어진 떡볶이 집 테이블까지 냉면손님이 들어찼고 떡볶이집 아줌마들도 냉면을 먹고 있었다.  내가 선전을 해서 냉면을 먹으러 온 친구 석균이와 동생 재완이는 냉면 대신 서빙을 하는 중이었다.  성당 냉면집은 냉면을 달라는 손님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떤 분들은 한 그릇을 드시고 집에가서 식구들을 데리고 다시 오기도 했고 비슷한 방식으로 친구들, 동네사람들도 데리고 왔다. 주택가 가운데 있던 성당주변의 비신자분들들도 인파를 보고 구경삼아 왔다가 눌러앉아 냉면을 먹었다.  오후 세시가 되기전 냉면은 예상판매량의 3배를 넘기며 동이 났다. 그러나 냉면을 먹으러 왔다가 졸지에 서빙을 하게된 석균이네 형제는 남겨둔 공짜 냉면으로 보상을 받았다. (이 녀석과 나는 염리동 을밀대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같이간 친구이다) 

“육수가 다 떨어졌어요~ 내일은 더 많이 준비할테니 내일 오세요~!!”

엄마는 그 길로 정리를 다른 아줌마들에게 맡겨두고 다시 육수를 만들러 집으로 갔다.  김치는 새로 담글 수 없어 백방으로 뛰면서 비슷한 것으로 대체했다. 두 번째 날의 냉면은 그 때문에 첫날만 못하였으나  이미 소문이 난 뒤여서 떡볶이집을 합쳐 더욱 크게 장사를 했고 버들표냉면 아저씨는 계속 짐자전거에 냉면을 신나게 져날랐다.  냉면집은 성당 바자회에서 어느 코너보다도 더 많은 수익을 냈다.  엄마는 파김치가 되어 며칠동안 몸져 누워야했다. 

이듬해에 다시 바자회 얘기가 나왔을 때 당연히 냉면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지만 엄마는 아예 그 자리에서 피신을 한 뒤였다. 하지만 성당에서 파견된 사절단의 수차례에 걸친 간곡한 요청으로 이듬해에도 냉면집이 열렸고 그 해 역시 많은 냉면을 팔아치웠다.  

지금 서 있는 성산동성당의 벽돌 상당수는 냉면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예수님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그 후 사람들에게 냉면의 ‘냉’자도 입밖에 꺼내지 못하게 했다.


P.S -아래 그림은 성산성당 홈페이지에 있는 성당의 연표. 정확한 날짜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는데 바자회 날짜까지 그대로 있을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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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성당 냉면

  1. 야간비행

    망원동 수해는 정말 잊지 못할 기억이에요. 밖이 시끌벅적한 상황에 영실업 패크맨(!) 게임기를 가지고 놀다가 어머니께서 지금 바로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밖을 보니 어른 무릎까지 물이 차올랐었죠. 윗집 아저씨가 형과 저를 동시에 업고 7번 종점까지 나가서 할머니와 같이 택시를 타고 둔촌동 고모댁을 가려고 했었는데 잠실대교 남단도 이미 물에 잠겨서 차를 돌려 반포주공아파트 외삼촌 댁으로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7살이었던 제가 외삼촌 댁 동호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서 그나마 갈 수 있었죠. 생각해보면 일요일 오전에 여동생의 시어머니가 조카들과 함께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꼴이니 외삼촌께서 얼마나 놀라셨을까도 싶어요.

    성산성당 3차 바자회때는… 아이스크림을 싸게 사먹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망원초등학교에서 성당까지 친구들과 1km 를 달려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여덟살밖에 안되었었는데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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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Post author

      오~ 3차때 오셨군요. 아이스크림을 팔았었군요 ? ㅎㅎ 그땐 다들 망원동 하면 수해만 기억했죠. 대학때도 망원동 산다고 하면 다들 “아~ 침수된 곳?”이라고 인사말처럼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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