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차기 (혹은 컵차기)

By | 2022-01-07

복학생들을 중심으로 90년대초반 팩차기가 대유행했다. 복도를 지나는 길에 애들 네 명이 진지한 모습으로 팩차기 하는걸 보고 혀를차며 지나갔다. 어느날 복도를 지나는데 동기 두 명이 모자란 인원으로 어렵사리 팩차기를 하고 있었고 때마침 지나가는 나를 녀석들이 불러세워 쪽수를 맞추고자 했다. 나는 손사레를 쳤지만 결국 다른 애들이 올때까지만 맞춰주기로 하고 들어갔는데 조금 익숙해지니 팩차기 마성에 그만 흠뻑 빠지고 말았다. 

거기엔 우주의 삼라만상이 결집되어 있었다. 팩은 아무리 잘 찬다 할지라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의외성이 있었고 그걸 따라가 살려내는 동료의 헌신적 노력과 지켜보는 이의 응원과 경탄, 그리고 팩을 떨어뜨렸을 때의 비애가 있었다. 발로만 차는 것이 아니라 무릎과 가슴 트레핑, 헤딩, 어깨로 받아치기, 뒷발차기, 슬라이딩의 다양한 기술과 피지컬, 고도의 집중력, 협업과 예측, 상황판단도 필요했다.  
우리는 이전과 달리 이제 경건한 마음으로 딸기 우유를 마셨고 매점은 250ml짜리 우유가 오전에 매진되는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남은 우유가 얼굴에 튀지 않도록 먹고난 팩을 정성스럽게 세척하고 볕에 말리면서 자원 재활용과 환경문제를 걱정했고 우유가 건강에 미치는 유익한 점을 몸소 체험하며 건전한 심신의 함양과 우정의 증진에 대해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쉬는시간 종이 울렸을 때 준비된(잘 말린) 우유팩을 들고 복도로 나아갔다. 

새 우유팩을 정성스레 접으려 시도하는데 뒤에서 보고있던 동기 아무개군이 접는 방식이 틀렸다며 자신이 오래 갈고 닦은 노하우대로 팩을 접고 정육면체에 가까운 팩을 새로 산 야구글러브 길들이듯 모서리를 누그러뜨려 의외성을 최소화한 구에 가까운 팩으로 재탄생 시키자 지켜보던 동기들이 그의 천재적 예술성과 장인정신에 감탄한 나머지 마음속깊이 우러나오는 흠모의 갈채를 보냈다. 

그 후 우리는 희소성있는 우유팩 자원과 유당분해에 어려움을 겪는 동기들의 건강을 고려해 새로운 대안을 찾고있었는데 어느날 아무개군이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깨끗하게 세척한 다음 둥그렇게 말린 종이컵 끝을 모두 손톱으로 깨끗하게 펴서 그걸 다시 2cm가량 안으로 곱게 접어 넣고 컵 맨아래 부분의 2mm가량의 다리역할을 하는 테두리까지 안쪽으로 접으면 반발력과 체공시간, 비행거리, 내구성까지 완벽하게 갖춘 팩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의 발견은 팩차기 세계에 일대 혁신을 몰고왔다. 이제 원치않는 우유를 비싼 돈을 내고 일부러 마시지 않아도 되었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일도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더 싼값에 더 쉽게 구할 수 있는 대체물질을 찾은 것이었다.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우유팩의 반발력과 의외성을 억제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한계가 있어 가끔 급하게 팩을 쫓아가다 힘조절이 안될땐 홈런이 나오기도 했는데 컵의 최대 비행거리는 힘과 속도의 증가에도 한계체감 시점이 일찍 찾아와 언제나 선수들의 활동반경을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4인 기준으로 팩차기는 떨어뜨리지 않고 30회정도가 한계였지만 컵으로 넘어오자 기록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물론 그 사이 우리의 기술과 팀웍도 좋아져 벨트라인 근처 높이로 빠르게 4인의 써클밖으로 빠져나가는 컵도 뒷차기로 다시 써클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고, 머리나 가슴높이로 솟구치는 컵을 트레핑이나 헤딩으로 내 앞이나 근처에 떨구면 동료들이 미리 감지하고 그것을 받아내곤 하였다. 전술상의 변화도 있었다. 4~5명이 써클 대형으로 경기를 시작하면 이전엔 가급적 그 위치를 사수하려고들 했는데 이젠 공이 있는 곳으로 써클을 순간적으로 옮겨가며 더 안정적으로 컵을 처리했다. 

이에따라 경기시간도 길어져 가끔 쉬는시간을 넘겨 수업시간까지 이어지기도 했는데 그때문에 수업하는 교수님이 탄성과 발소리, 컵이 내는 퍽, 퍽하는 경쾌한 소리에 견디다 못해 나와 항의하는 일도 잦아졌다. 공을 쫓는 플레이어가 복도를 지나는 일반 학우들과 충돌하는 일도 많았다. 

우리의 노력은 여름이 되기전에 결실을 맺었다. 어느날 수업 후 쉬는 시간이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5인의 멤버가 5층 경상대 복도로 나가 플레이를 시작했다. 이미 복도엔 우리과와 다른과 학생들이 열심히 팩을 차고 있었다. 세 번쯤 찼을때 기회가 찾아왔다. 연이어 결정적인 선방이 나왔던 것. C군이 거의 바닥까지 떨어진걸 180도를 빙글 돌아서며 걷어올렸고 그 순간 양쪽에서 쫓아간 친구들이 기어이 그 볼을 살려내 그 지점에 써클이 그대로 옮겨가 계속 찼다. 아까 말한 가장 까다로운 허리높이로 빠르게 써클을 벗어나는 컵을 내가 뒷 발로 한번 건져 올렸고 흑피다모군이 그걸 안정화 시켜 결국 그 라운드에서 우리팀이 가진 신기록을 경신하며 133회란 전인미답의 금자탑을 세워올린 것이었다. 우리 다섯은 계속 숫자를 세며 목소리가 높아졌고 마지막 신기록을 넘어 하나하나 숫자가 올라갈때마다 합창을 했다. 마지막 133은 탄성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목소리가 가득했다.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은 대기록에 영향을 미칠까봐 잠시 서 있거나 멀찌감치 돌아갔다. 

그 순간 506호 문이 열리며 익숙한 교수님 얼굴이 나왔다. 
“제발 복도에서 그러지 좀 말자. 시끄러워서 수업을 할 수가 없어!”

“죄송합니다아~~”

다음날이었다. 또 다른 신기록에 도전하고 있었는데 카메라를 맨 어느 여학생 하나가 수첩을 들고 우리의 플레이를 호기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잠시 플레이가 중단되자 그 여학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정말 재미있게 하시네요. 전 국민대 학보사 기자인 OO학과 9x학번 아무개라고 합니다. 컵차기가 유행이고 이 팀이 가장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취재해도 될까요?”

나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고 말했다.

“아휴~ 소문 제대로 듣고 오셨네요. 우리가 얼마전 133개로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아마 교내를 모두 조사해보셔도 저희가 최고일겁니다. 그만큼 열심히 연습했고요”

“민주광장같은 공터도 있는데 굳이 복도에서 차는 이유가 있나요?”

이번엔 H군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바람의 영향이 크죠. 게다가 복도는 슬라이딩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구요. 비오는 날에도 찰 수가 있죠. 2호관 복도는 컵차기에 딱이에요. 가끔 벽을 이용할때도 있다니까요”

“아항~ 모두 과학적인 이유가 있는거군요. 연습은 그럼 얼마나들 하시나요?”

이번엔 C군이었다. 
“거의 매시간 쉬지 않고 합니다. 물론 밤엔 학교앞 북악골 당구장에서 당구치고요”

“오~ 멋지네요. 그럼 제가 여러분들 사진 몇 장 찍어도 될까요?”

“그러믄요~ “(일동)

“자아 그럼~ 모두 모여서 컵을 내보이면서 화이팅해주세요. 갑니다 하나 둘 세~엣” (찰칵)

“몇 장 더 찍을께요 자 갑니다”

“네네 좋습니다. 이번엔 플레이하는 모습을 찍을테니 평소처럼 플레이 해주세요”

(잠시후)

“아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들 친절하게 협조해주시는군요. 기사는 아마 다음주 월요일 판에 실리게 될거 같아요. 선배님들 그럼 남은시간도 화이팅하시구요~~”

여학생 기자가 어찌나 말 잘하고 똘망똘망한지 복학생 다섯명은 잘가라며 복도 끝까지 손을 흔들어줬다. 우리는 오매불망 다음주 학보가 나오기만 기다렸다.

월요일 강의가 오후라 조금 늦게 학교에 나왔는데 복도에서 마주친 여자 후배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 선배님 사진 학보에서 봤어요 잘나왔던데요?”

“오 그래, 어디서봤니?”

“과사에 가보세요 다 거기 계세요”

“그래 고맙다아~~”

과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우리 멤버 몇 명과 선후배들이 모여 학보를 보고 있었다. 우리애들 표정은 묘~ 했다. 

“어때? 잘나왔다며”

“네가 직접 봐”

1면 머리기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1면에 나왔고 사진도 손바닥만했다. 헤드라인을 보니 이렇게 써있었다.

‘몰지각한 학우들의 팩차기 행태, 이대로는 안된다’

기사를 보니 더욱 신랄했다. 
‘공부는 뒷전이고 복도에서 남의 학업과 통행까지 방해하는…’

“흐음…. 이 우라질 x을 그냥…”

일어서는데 뒤에서 O군이 한마디 한다

“야 가긴 어딜가냐 쪽팔리니까 그냥 있자..”

P.S –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 재현해 본 컵

Facebook Comments

One thought on “팩차기 (혹은 컵차기)

  1. 혁신디자이너 신우진

    에피소드를 보며 잠깐 추억에 잠기기도 하며 마지막에 그 여학생과 결혼을 했고 지금의.아내가 그때의 여학생으로 끝날줄 알았는데 반전까지 너무 재밌네요.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었어요. 한편의 서사를 읽는 듯한 착각을

    Reply

혁신디자이너 신우진 에 응답 남기기 응답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