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침

By | 2021-12-22

이 황당한 이야기를 하려면 내 오랜 친구 S군에 대한 배경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 본론에 접근조차 할 수 없어 건너뛰기로 한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S군은 세상에서 사라진 후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잡았을 즈음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황당하게도 그렇게 다시 나타나서 한다는 얘기가 결혼이었다.  결혼직전 나에게 신부감을 소개했는데 걱정과는 달리 신부는 정말 멀쩡했다.  녀석이 이제는 정신차리고 자리를 잡나 싶어 결혼 후 집들이에 불렀을 때도 만사를 제쳐두고 S의 신혼집으로 달려갔다.  보통 친구들의 집단별로 집들이를 여러번 하는게 관례였지만 S는 신랑신부를 통틀어 제일 친한 친구들만 불러 딱 한 방에 집들이를 진행했다.  그래서 집들이에 온 손님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재미있게 놀았고 신부측 친구들도 다 괜찮았다. 


솔직히 신부의 친구였던 K는 여러면에서 나를 끌어당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입사원이었던 난 다음날 출근을 고려해 밤이 깊어지자 그만 일어서려고 했다.  내가 일어나려는 낌새를 눈치채고 신부인 P양이 잽싸게 내옆으로 옮겨 앉아 내 어깨를 눌러 다시 주저앉혔다.  그러자 신랑 S군이 내 겉옷을 아예 장롱속 옷걸이에 걸어버렸다.  P양이 달래듯 말했다.


“오빠, 오랜만에 우리 오빠랑 만났는데 오늘은 밤새 얘기하면서 주무시고 가세요”

“아…저도 그러고 싶은데 안돼요.  신입사원이라 일찍가야 하는데요”

“여기서 일찍 나가시면 되죠. 제 친구 K도 같이 있을거에요 어때요?”

아…신부 P양 눈에도 내가  K양을 힐끔거리는걸 본 모양이다.  P양은 후속 조치로 K양을 재촉했다. 

“얘~ 넌 집 가까우니까 가서 옷편하게 갈아입고와. 네가 있으면 이 오빠도 집에 안간데”

너무 노골적인 신부의 멘트에 창피했지만 그렇다고 저항도 안하고 멍청하게 앉아있었다. 뻘쭘하긴 K양도 마찬가지여서 계속 쭈뼛거리고 있었는데 신부 P양이 등을 떠밀자 마지못해 먼저 일어나 나갔다. 그 사이 손님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아예 그 집에서 씻고 S군의 옷으로 갈아입고 방을 치우고 있었다.  술은 먹을만치 먹었으니 K양이 돌아오면 넷이서 밤새 고스톱이나 치면서 얘기나 하자고 신혼부부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말을 했다.  밤 11시가 넘어 K양이 동네 마실 나가는 편한 옷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서는 K양과 눈이 마주치자 별로 할 얘기가 없어 등신같이 배시시 웃으면서 ‘오셨어요?’ 라고 멘트를 날렸는데 어찌나 무안하던지.  건너방에 자리를 깔고 넷이 모여 고스톱을 치다 자기로 했는데 S군이 안보인다. 난 씻으러 들어간 줄 알았는데 그걸로 S는 자취를 감추었다. 당황스러워서 P양에게 S놈은 어디에 갔냐고 물으니 태연하게 피곤해서 먼저 잔다더라고 했다.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P양은 틈을 주지 않고 이어서 멘트를 날렸다. 


“저도 너무  졸려서 그만 들어가야 겠어요.  좋은 밤 보내세요. 탁~ (문닫고 나가는소리)”

내 생애 가장 황당한 밤이었다.  방안에 남은 나와 K양은 이미 깔려있는 이불위에 앉아 있었다.  화투라도 있었다면 패를 돌리고 싶은 어색함이 이어졌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니 S-P 부부 사기단의 기획의도가 보였다.  덮고 자는 이불도 딱 하나만 남겨둔걸 보니 어떻게든 우리 둘을 한이불에서 재우려는 수작같았다.  정말 대담무쌍한 계획이었다.  K양이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상황이 간단하게 정리될뻔도 했는데 K는 그러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K양은 이 침묵을 깨지 않고도 견딜 자신이 있는것 같이 보였으나 난 무슨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우리 그냥 자죠”  

얼떨결에 나온 말이었는데 생각해보면 어찌나 등신같은 멘트였는지 입에서 튀어나온 직후부터 후회막심했다. 그런데  K양의 답변이 그 모든 회오리를 잠재웠다. 


“불은 끌까요?” 

“네? 네네”


우린 어색하게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처음엔 어두워서 보이지 않다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나를 향해 옆으로 누운 K양의 실루엣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몸은 이불밖에 있었다.  차마 같은 이불로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듯 했다. 


“저어… 아무일 없을테니 추우실텐데 위로 올라오세요.  이불도 덮으시고요.” 


K양은 머뭇거리다가 몸을 일으켜 이불안으로 들어왔다.  표정은 살필 수 없었지만 가느다란 향기가 이불을 덮을 때 꼬끝을 간지럽혔다.  K양은 이불을 덮고 조용히 말문을 열였다.


“상황이 좀 이상해졌는데 그렇다고 저까지 이상한 여자라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아 ..네 그럼요. 전 다시 집에 돌아가시면 어쩌나 했어요” 

투수로 따지면 실투에 가까운 발언이었지만 K양은 맞받아 치지않고 조용히 그 볼을 지켜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돌아가긴 싫었어요. 제가 편하게 그냥 오빠라고 부를께요. 오빠는 저 때문에 남으신거죠?”

K양은 애써 빙빙 돌리지  않고  한가운데 돌직구를 던져넣었다.  오히려 핀치에 몰린건  나였다. 서로를 마주보고 옆으로 누운거라 가끔 무릎끼리 무딫히기라도 하면 깜짝 놀라 피하는건 나였다.  이런 등신같으니 .  K양은 조용한 타입이었지만 나직하고 조곤조곤하게 물어볼건 물어보고 자신에 대해서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여자친구는 없는지, 왜 없는건지, 예전 여친은 어땠는지에 대해 물어본 후 그때부터 내가 가진 이야기 보따리를 즐겁게 듣기시작했다. 


그제쯤되자 K의 초롱초롱한 눈과 표정도 보이기 시작했다.  탐색전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오렌지 한 알이 들어가지도 않을만큼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소리는 크게 못내고 코웃음을 치며 재미있게 얘기를 들어주었는데 어찌나 리액션을 이쁘게 하는지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손으로 허리를 끌어당길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사실 왼쪽으로 누웠던 내 오른손은 아까부터 이불밖을 방황하는 중이었다.  새벽이 가까워오면서 우린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곤하게 잠들어버렸는데 그때문에 출근도 물건너가버렸다.  


애가 타는 족은 잠들어버린 나와 K양이 아니라 이 대담한 작전을 기획한 S-P부부였다.  출근시간이 되도록 건넌방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신부 P양은 낯뜨거운 장면을 보게 될까봐 방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거실에서 결과(?)를 기다리며  애를 태웠다고 한다.  나보다 K양이 먼저 깼는데 그는 일어나지 않고 이불 속에서 자기 어깨에 올려진 내 오른손도 놔둔채 싱글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런…몇 시에요?”


“글쎼요 모르겠어요 어쨋든 출근시간은 지난거 같아요” 


우리는 안방의 부부보다 더 부부같은 모습으로 거실로 나섰고 P양은 수술실을 나서는 의사손을 붙잡은 환자가족의 표정으로  K양의 손을 잡고 표정을 살폈다.  우리 네 명은 모두 계획에 없이 오전을 쉬었고 나도 회사에 전화를 걸어 연신 수화기에 머리를 조아리며 오후에 나가겠다고 빌었다. 


다음날  회사로 P양이 전화를 걸어왔다. 


“오빠~ K 어땠어요? 괜찮죠 그쵸?”


“하하 네 정말 마음에 들어요.  K양은 어떻게 생각한데요?”


“흐흐 K는 뭐 오빠한테 홀딱 빠졌어요.  원래 디게 신중한 앤데  그날밤 뭘 했는데 걔가 그렇게 된거에요?”


“아~ 그냥 얘기만 밤새 했는데요?  K한테 먼저 물어본거 아니에요?”


“기지배가 웃기만하고 얘길 안해줘요. 아 그리구요…좀 오버하는거 같긴 한데. 오빠가 어디 김씨냐고 물어보래요.  어느 파인지까지요”

 
“네? 김해김씨 삼현공판데요…”


“네네 알았어요. K가 전화번호 안줬죠? 제가 오빠한테 전화하라고 할께요”

난 역사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나보다 생각했다.  사실 좀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K는 괜찮은 여자였고 하루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도 이해가 되었다.  소개팅을 해서 10번쯤 만난것 같은 진도를 하루밤에 다 이루었으니 말이다.  다음날 다시 P양에게 전화가 왔다.

 
“아..오빠 어떡하죠?  K도 김해김씨 삼현공파래요.  너무 좋긴한데 정들고 나면 어려워질까봐 그냥 안만날거래요. 어쩌죠?”


“네? 아니 요즘 시대에 동성동본으로 못사귀는게 어딨어요. “


“에휴 그러게요… 그날 오빠가 강을 건너고 다리를 불살라버렸어야 했어요”


“아…정말 그랬어야 했나… 안타깝네요 알겠어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K양네 집은 부모님이 그런걸 많이 따지는 집이란다.  S군과는 친했고 P양과도 친해져서 오다가다 K양과 마주칠 일이 몇 번 있었지만 K양은 내가 올만한 자리엔 미리 물어보고 마주치는걸 일부러 피했다고 한다.  하지만 평생을 두고 나나 K양이나 잊지 못할 추억 하나는 만든 셈이 되었다. 

 이야기 초반에 S군이 참 특이한 놈이었다는 얘길했는데 그래서 난 내내 불안했고 아내인 P양과 친해진것도 S군의 동태파악을 위해서였다. 예상대로 P양이 S군에 대해 묻는 전화를 나에게 자주 걸어왔고  나는 ‘올것이 오나보다’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서 한 동안 S, P 각각에 대해 연락을 못하고 있다가 어느날 P에게 전화를 걸었다.  

P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는데 (P는 워낙에 밝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S에 대해 물어보니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몇 개월전에 이혼을 했고 S는 또 잠적했다는 소식이었다.  지금까지 S-P와 관련된 기억이 K를 포함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을 처음 만나고 3년쯤이 흐른 후였다. 

Facebook Comments

One thought on “동침

  1. Pingback: "관례하다"에 관한 내용은 어떤게 있을까. - 모두의 정보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