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기

By | 2021-11-14

난 열심히 타자치고 있는데 인사계가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일어나더니 그런다.  자긴 타자소리가 자장가 같이 들리는데 내 타자치는 소리가 제일 리드미컬해서 듣기 좋다나?  아닌게 아니라 타자기는 컴퓨터 키보드보다 훨씬 소리가 큰데도 남이 치는 소리는 듣기 좋을 때가 있다. 

난 부대에서 지급된 커다란 올리베티 타자기를 썼는데 이건 많이 치면 손가락이 아파 가끔 저려올 때가 있다. 특히 받침을 칠 때 사용하는 새끼손가락에 무리가 많이 가는편.  나는 워낙 타자를 세게 치는 편이라 옆방 교육계 고참한테 활자 망가진다고 가볍게 잔소리를 여러번 들었었다. 

똑같은 문장을 쳐도 사람마다 타자를 치는 리듬이 다르다. 나는 누르는 힘이 커서 행정반에서 제일 소리가 컸지만 리듬은 제일 좋아서 마치 블랙사바스의  기타리프같이 중독성 있게 반복되었다. 반면 남수사관은 몸은 나보다 컸지만 가방에 들고 다닐 수 있는 개인용 작은 타자기를 썼는데 기본적으로 소리가 작았고 올리베티같이 탕탕 하는 소리보다 콩콩 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야 문장이 짧은 전언통신문을 주로 쳤기에 호흡이 짧았지만 남수사관은 문장으로 길게 서술되는 조서를 작성했기에 호흡이 길고 나즈막했다. 타자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10명이내였고 3개의 사무실 문을 열어놓고 있었기에 서로의 타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당연히 타자수들 끼리는 타자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타자기는 총 4~5대정도였는데 한창 바쁜 오후엔 서너대의 타자기가 일제히 합주를 시작했다. 

처음엔 시끄럽지만 듣고있으면 이 합주소리에 조화가 생겨나 합창과 같이 화음을 형성했고 복도를 타고 당직실과 내무반으로 타고 흘렀다. 내무반에선 그 박자에 맞춰 전투화의 맷기를 올렸고 영창 당직대 근무자는 그 리듬대로 졸았다. 

타자기마다 활자를 바꿔야 하는 유독 많이 쓰는 글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타자를 친 내용을 읽다보면 어느 사무실의 어느타자기로 친 것인지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수사관실의 타자기들은 활자와 먹지가 달랐으므로 활자색깔부터 달랐다. 타자기를 수리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사단사령부에 있다 해도 타자기 수리병이 있는게 아니었으므로 보통 그런 타자수리는 수리병이 사단을 순회하곤 했는데 그럴때 잽싸게 가서 타자기를 수리해와야 했다. 수리를 마친 타자기는 기름칠한 자전거처럼 한동안 기분좋게 잘나갔다.

초보 타자수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먹지를 갈아끼우는 일이었다. 리본은 20센치보다 조금 더 길다란 종이상자에 들어있었는데 얼핏보면 만년필통 같았다. 처음에 제대로 끼워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먹지통에 제대로 들어가게 되는데 중간에 한번 삐끗하거나 실수로 먹지를 바닥에 엎게되면 그걸 똑바로 수습하는데 수십분이 걸렸다.  노련한 인사계는 아예 종이상자를 플라스틱 먹지통에 솜씨좋게 맞춰서 부어 넣은다음 양쪽 끝만 제대로 걸어서 마무리 했는데 나는 10분동안 쩔쩔매는 일을 1분만에 해내곤 했다. 먹지를 갈고나면 양쪽 엄지와 검지손가락이 하루종일 새까맣게 먹물이 빠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군대 문서다 보니 볼펜으로 표를 그려야할 때가 오는데 난 보통 타자를 먼저 다 치고나서 종이를 빼낸다음 자를 대고 표를 그렸다. 표를 그릴때 볼펜똥이 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타자를 쳐야 했으므로 행정병들은 모두 제각각 ‘화장실’을 만들어뒀다. 화장실은 크리넥스 한 장을 계속 반으로 접어 가로세로가 5~6cm로 두툼해졌으면 청테이프로 책상 귀퉁이에 붙여놓고 모나미 153볼펜에 똥이 생길때마다 계속 그 화장실에서 닦는다. 

다른부대의 일부 변태들은 PX에서 팬티라이너를 사서 그걸 반으로 접어 화장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걸 책상을 닦는 걸레로도 사용한다) .어느날 내가 표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인사계가 답답한 듯이 쳐다보고 있다가 타자기에 숨은 기능을 하나 알려주었다. 타자기 활자가 종이를 때리는 부분 끝에 조그만 구멍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 볼펜구멍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볼펜을 대고 활대를 왼쪽으로 주욱 밀면 가로줄이 그어졌고 오른쪽 동그란 손잡이를 올리면 세로줄을 그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인사계가 나보다 5배 정도는 빨리 그 자리에서 자없이 표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볼펜똥도 없이 말이다) 

행정병들이 즐비한 사단 사령부 사무실에 들어서면 타자소리가 소나기 같이 쏟아졌다. 가끔 그 소나기같은 타자소리가 그립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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