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치료사

By | 2021-11-08

훗날 신촌 창천국민학교앞 건물 2층에 자리잡게되는 Doors의 전신은 지금의 신촌역 바로 앞에서 Rock이란 간판으로 문을 열었다. 어쨋든 난 그 가게를 승재를 거쳐 세민씨에게 소개받고 즉시 죽돌이가 되었다. 그게 아마 1990년이었던걸로 기억한다. 군대를 가기위해 휴학을 한 상태였으니 잘 기억한다. 가게가 처음 시작할땐 2~3천장의 LP가 있었던 것 같다. 그때의 다른 가게와 마찬가지로 손님들은 카운터에 놓인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와 볼펜을 가져다가 신청곡을 써내곤 했다. 난 가게의 죽돌이였으므로 단골손님들과 거의 안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항상 눈인사를 나눴다. 단골들은 거의 천편일률적인 차림을 하고 가게에 들어왔다. 뭔가 부스스한 머리와 청바지, 그리고 셔츠와 후드, 야상 차림으로 겹쳐입은 모습으로 어깨에 기타하나 메고 입에 담배를 물면 영락없는 마로니에 공원의 악사같은 모습이었다. 내 모습도 다르지 않았고 난 그런 편한 차림들이 좋았다. 느낌적으로 70년대의 히피족들 사이에 있는 기분이었다. 

우린 사실 서로의 이름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 취향은 잘 알고 있었다. 예를들어 ‘프랑켄쉬타인’같은 곡이 흘러나오면 가게를 둘러보고 그걸 누가 신청했는지 한 두번만에 맞출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때 나의 레퍼토리는 거의 뻔했다. 도어즈-레드제플린-핑크플로이드같은 그룹들이었다. 가끔 가죽바지에 긴머리를 늘어뜨린 녀석들이 오면 가게안은 메탈리카와 메가데스가 울려퍼졌다.

어느날인가부터 저녁시간을 넘겨 혼자와서 구석에 앉아 한 두시간 동안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먹으며 조용히 있다 돌아가는 정장차림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에 모든 이가 수근댔다. 보통 이 가게에선 다들 쉽게 친해지는데 그 남자는 정말 조용히 두 세잔쯤 마시고 중구남방으로 신청곡을 적어내곤 구석에 앉아 듣다가 역시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그의 겉모습이 우리와는 사뭇 달라서 우리는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우리 중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걸어보진 못했다. 그 때 난 그를 In through the out door 앨범 쟈켓의 남자라고 지칭했는데 몇몇이 나의 표현에 맞장구를 쳐줬다.  그가 신비로웠던 것은 말을 안해서이기도 했지만 신청곡 리스트가 거의 랜덤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조용히 신청곡을 적어서 데스크로 가져오면 왁자지껄 떠들던 우리는 갑자기 조용하게 그가 신청곡 쪽지를 들이밀고 자리로 돌아갈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누구하 할 것도 없이 그가 신청한 쪽지를 냅다 손바닥으로 끌어 자기 몸앞으로 가져오면서 곡목들을 보고 그를 가늠하려 했다.  그의 신청곡 리스트를 랜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산울림에서 시작해 김추자와 레인보우, 척맨지오니와 유럽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했던 탓이다. 

분명한건 깊이는 없다는 거였다. 그때부터 다들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별별 추측이 나올때마다 모두들 일제히 그를 한번 돌아보고 고개를 흔들며 다른 추측으로 이어갔다. 정말 묘했다. 일반 회사원이라고 하기엔 그의 정장색상이 좀 튀어보였다. 제일 간단한건 그의 테이블로가서 직접 물어보는거였는데 그 때쯤엔 다들 오기가 생겨서 맞춰보거나 그가 먼저와서 말을 걸기를 바랬다. 

어떻게 그가 데스크로와서 먼저 말을 걸게 할 수 있을까?…우리는 뜬금없이 그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내가 결정적인 제안을 했다. 그의 신청곡에 대한 대응곡을 편성하자는 아이디어였다. 모두들 순간적으로 “기가막인 아이디어”라 칭송했다. 


방법은 이랬다. 깊이가 없는 그의 신청곡이 4곡쯤 있으면 우리는 각 곡에 대해 같은 그룹이나 비슷한 쟝르에서 더 좋은곡, 들어볼만한 곡을 틀어주는 거였다. 예를들어 그가 퀸의 썸바디 투 러브를 신청하면 그 곡이 나간후 우린 마치 어브 더 블랙퀸을 틀고, 라잇 마이 파이어를 신청하면 엘에이우먼을 트는 식이었다. 우리는 가요, 락, 프로그레시브 전문가들이 각각 있었기 때문에 쟝르를 나누어 선곡위원(?)들이 자동으로 정해졌다. 순번이 몇 번 돌고 그가 Since I’ve been loving you를 시켰을때 레드잽 빠인 내가 Kashmir로 대응했을 때 그가 참지 못하고 데스크로 걸어왔다.  가요 담당인 A 언니가 나즈막하고 빠르게 얘기한다. “온다 온다” 


“저어~ 지금 나오는 곡도 레드 제플린인가요?”

“네에 캐시미어에요 ^^”

“아~ 어느 앨범이죠?”(그때 판돌이를 하던 가게사장 호성이 형이 잽싸게 피지컬 그라피티 앨범을 뽑아줬다)

“이거에요 3집 쟈켓이 제일 신기한데 이 앨범도 신기하죠 창문 좀 보세요”

“아~ 이 곡 정말 좋네요. 앨범도 멋지구요”

“그쵸? 하하 이 가게에서 자주뵈었는데 인사는 처음하네요 살례지만 어떤일을 하세요?”

“아 네에~ 전 물리치료사에요. 정말 좋은 장소를 알게돼 자주 오게되었죠”


그가 직업을 말하자 다들 일제히 “아~~”하는 탄식을 쏟아냈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키득댔다. 진짜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우리는 셜록홈즈 처럼 몇 주 동안 낄낄대며 토의하고 생각했던 것에 만족해했다. 이런게 소소한 재미 아니겠는가. 그 후로 그 물리치료사 양반은 혼자 구석에 앉지않고 우리처럼 바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가끔 얘기를 나누고 조용히 음악을 듣고 모르는 곡이 나오면 묻곤 했다. 

그가 바테이블에 밝은색 양복을 입고 우수에 찬 모습으로 앉아 있는 모습은 정말  In through the out door의 쟈켓같았다. 


P.S – 솔직히 그 양반을 꼬셔낸 곡목은 기억나지 않아 임의대로 각색했다. 확실한건 결국 내가 친 덫에 걸려들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레드제플린이나 도어즈, 둘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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