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즈의 단골들

By | 2021-10-19

★J씨의 음반리뷰

도어즈에 거의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하는 J씨는 항상 반쯤 취해있는 말투였다. 항상 맥주 몇 잔으로 고사를 지내면서 오래동안 자리를 지키고 음악을 들었다. 언뜻보면 할일없는 실직자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안경에 약간 마른 체형, 항상 헝클어져있는 머리, 하지만 출근하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콤비쟈켓과 면바지에 랜드로버, 음악 잡지와 신문, CD가 들어있는 메신저백이 항상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와 친하진 않았지만 나 역시 거의 출근도장을 찍다시피 하는 처지라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그걸 빌미로 얘기도 몇 마디 나누고 가끔 서로의 오징어 안주를 집어먹기도 하는 그런 막연한 관계였다. 모르긴 해도 그는 나보다 네 살쯤은 많아 보였다. 


그와 그렇게 몇 개월을 같은 술집에서 보내다보니 그의 음악 스펙트럼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를 비롯해 그와 약간 어울리는 몇몇 사람들은 대략 팝을 중심으로 여러 다른 쟝르에도 발을 걸치고 있었다. 락음악도 좋아했지만 깊이가 얕은걸로 보아 빌보드차트를 중심으로 음악을 듣는 분 같았다. 하지만 커버하는 영역이 상당히 넓었고 올디스 부문의 조예도 상당해서 양으로만 따지자면 나의 두 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내가 그 술집을 드나들면서 관찰한 바로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일 수록 넓게듣고 타쟝르에 대한 편협함이 적었다. 반대로 특정 쟝르에 목을 맨 자들은 해당분야만 열심히 파기 바빴고 좀처럼 다른 쟝르로 넘어오지 않았다. J씨는 전자에 해당했다. 그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아마 돈없이 주막을 얼씬거리는 낡은 갓을 쓴 양반네 정도라 상상이 되었다. 딱 봐도 고정적인 일거리가 없어 보였다. 사실 그 술집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그래보였다. 그런데 어느날 J씨가 초저녁에 나타나 멀쩡한 목소리와 쾌활한 분위기로 바에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며 500cc짜리 맥주를 한 잔 샀다. 무슨 일이냐 물어보니 새로 취직을 했다는 말이 돌아왔다. 종로2가에 새로생긴 신나라 레코드에서 음반 안내를 맡았단다. 항상 없어보여 측은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그의 쾌활한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져 방금 그가 산 500짜리 잔을 높이들며 축하한다고 소리를 치고 그가 좋아하는 도어즈의 언노운솔져를 형님 사장님에게 부탁했다.며칠 후 세운상가 근처에 공테이프를 사러가면서 그가 근무하는 신나라 레코드에 들렀다. 그가 팝과 재즈 장르 진열대 사이에서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의 임무는 음반에 대한 문의를 듣고 음반을 찾아주거나 추천하는 일이었다. 음악에 대해 박식한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라면 손님들의 음악에 대한 질문이 즐거울터였다. 나는 이왕 들른 기념으로 CD를 몇 장 샀고 그가 따라와 직원할인까지 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얼마후 무슨 음반인지는 기억 나지 않는데 CD를 한 장 샀고 플레이어에 CD를 넣고 예의 하는대로 해설지를 읽었는데 그 해설지 마지막에 놀랍게도 J씨의 이름이 써있었다. 의아했던 것은 그 앨범이 그가 정통한 분야는 아니었다는 것이었고 그리 칭송할만한 작품이 아니어서 범작에 불과한걸 그는 해설지에서 명반이라 칭찬하고 있었다. 글을 읽고 썩 기분이 좋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글쓴이가 동명이인인것 같아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야 겠다 생각을 하고 한동안 잊고 있었다. 


J 씨가 취직을 하는 바람에 항상 출근도장을 찍던 그의 모습이 뜸해졌고 몇 개월이 흘러서야 겨우 도어즈에서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얘기를 잠시 나누다 일전의 그 앨범이 생각나 지나가는 말로 그에게 물었다. 그 앨범 속지를 혹시 쓰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 얘기를 하자마자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얘기를 꺼낼 것도 없이 그가 죄다 고백하기 시작했다. 앨범 속지를 쓰는 건 우리같은 사람들이 항상 로망으로 생각하던 일이었는데 돈받고 해설지를 쓰게되니 범작을 범작이라 할 수 없고 아쉬운 점을 칭찬으로 바꿔써야 해서 자신도 쓰고나서 괴로웠다는 얘기였다. 


자기도 예전에 글을 쓸땐 느낀걸 그대로 쓰는 것이 즐거웠는데 그걸 직업으로 만나니 이전의 즐거움이 깡그리 사라져버렸다면서 그렇게 타협하는 자신이 정말 밉더란다. 그날 그의 그런 얘기를 들으며 술집내에 있는 다른 직업 글쟁이들에게도 같은걸 물었더니 그들 역시 비슷한 대답을 했다. 


“좋아하는건 취미로 해야지 직업으로 하면 안좋을 것 같아요. 나를 속이게 되거든요”


또 다른 단골이자 비슷한 글을 쓰는 S씨가 한 말이 그대로 내 가슴을 관통했다. 어쩌면 나도 그들의 대열에 합류할 수도 있었는데 같은 대답을 여러명에게 듣고나자 딱 그날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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