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머천다이저

By | 2021-10-08

첫 직장인 LG홈쇼핑(현 GS홈쇼핑)때 비리폭로 문제로 회사를 소란스럽게 한 사건이 있었고 이후 벤처버블때 스타트업에 가담하고 2년도 안되어 망했던 경험때문에 세 번째 직장인 농수산홈쇼핑(현 NS홈쇼핑)에 입사했을 땐 그저 ‘조용히 있다 나가자’가 내 좌우명이 되었다. 새롭게 설립된 이 회사는 기존 홈쇼핑 두 회사로부터 많은 실무인력을 스카웃 해왔는데 나도 그 중 하나였다. 회사내 전직장 동료들과 대화를 나눠보아도 이 회사는 우리로부터 각 분야의 노하우를 모두 취하고 나면 차갑게 식으리라 여겨졌다. 그래서 난 이전과는 달리 성격과 맞지 않게 정말 조용하게 살았다. 오죽했으면 인사팀 정과장이 나에게 ‘미스터 사일런스’란 호칭이 붙었다고 알려줬을까. (그 얘길 듣고 쓴웃음이 났다)

그래서 내 주위의 가까운 팀 말고는 사람얼굴과 이름을 매칭시키지도 못했다. 이전 회사와는 달리 이젠 결혼한 몸이어서 연애에 대한 조언은 할 지언정 직접 가담할 일은 없어졌다. 다양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상품기획실, 방송제작실은 모두 복도 건너편 사무실에 있어 지리적으로 더더욱 차단되는 효과가 있었다. 일때문에 그쪽으로 넘어가 봐도 남자든 여자든 크게 눈에 띌만한 인물도 없었고 다들 고만고만했다.

눈에 띄는 걸로 굳이 따지자면 상품기획실에 ‘못난이 인형 3총사’로 우리팀에서 이름붙인 실수 많은 여성 MD 3명이 있었다. (MD=머천다이저, 필자주 ) 한 명은 썬글라스를 항상 머리위에 올리고 다녔고, 한 명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여름에도 신었으며 나머지 한 명은 너무 긴 생머리를 휘날리고 다녔는데 각자의 특징에 일관성이 있고 셋이 몰려 다녔으므로 그냥 그렇게 불렀다. ‘못난이’란 수식어가 붙은건 이들이 언제봐도 짜증내는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이들에게서 직접 이유를 듣고 친해졌다 ㅎㅎ)

특정 주제에 대한 여러팀이 모이는 회의가 시작되기전 총각사원들끼리 하는 얘기가 들려왔다.

“대리님은 사내에서 누가 제일 나은거 같으세요?”
“그야 이OO MD죠”
“아~ 대리님도 그러시구나. 다들 생각이 같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응? 누구라고? 난 이름과 얼굴이 매칭되지 않아 들어도 그게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외모로 따지면 못난이 3총사 중 하나 일텐데 누굴까 궁금하네’

그들과는 친하지 않은 사이라 그게 누구냐고는 차마 물어보질 못했다. 물론 물어보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말이다. 그날 이후 평소에는 그냥 흘려들었을 이OO MD의 이름이 이상하게 자주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놈도 그렇고 저놈도 그렇고 다들 이땡땡 엠디를 좋아한단다. 다른팀에서도 그를 칭찬하는 목소리를 자주들었다. 같은팀 총각놈에게 혹시 아는가 해서 물어봤다.

“야 너 이땡땡 엠디 아냐?”
“아, 상품정보 꼼꼼하게 입력하는 친구요? 이름은 시스템에서 봐서 아는데 얼굴은 몰라요”
“그래? 그 친구 담당 상품군이 뭔데?”

어깨너머로 이땡땡 엠디가 입력해놓은 백여개의 상품정보들을 보니 손으로 쓴 글씨도 아닌데 또박또박 이쁘게 쓴 글자처럼 느껴졌다. 정말 성의있게 하나하나를 쓴 느낌이랄까? 알고보니 이땡땡 엠디는 거의 모든 상품기획실 남자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경지에 올라있단다. 사내에 여자가 한 두명이 아닌데도 이정도라는건 상식적으로 군계일학의 외모를 지니고 있어야 가능할텐데 도무지 그런 사람은 기억나지 않았다. 파티션 너머 고객지원팀 사원 한 명의 머리가 올라왔다. 아마도 우리 얘기를 듣고 있었던 모양.

“이땡땡 엠디 저나 우리팀도 다 좋아해요. 정말 착하고 성실하고 이뻐요”
“아..전 얼굴을 몰라서 그런데 혹시 썬글라스를 머리위로 올렸거나 긴부츠를 사시사철 신거나 긴생머리는 아니에요?”
“어머, 그 셋은 콜센터에 부하를 주는 을사오적중 하나인데요. 게다가 얼마나 싸가지가 없다구요”
“아 그래요? 누구지 모두지 모르겠네”
“제가 가서 가르쳐드려요? 근데 차장님은 결혼하셨잖아요”
“어휴~ 그런거 아녜요. 그냥 궁금한 차원이니 그럴필요까진 없어요”

아니 이땡땡 엠디가 신비의 동물 유니콘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좋은 소리만 들려오는데 도대체 우리회사 총각사원 아니 모든 남성직원들이 흠모하는 그 사람을 나는 왜 모르는거야. 좀 짜증이 났다. 내가 짜증을 내니 우리팀 팀원들도 모두 같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수화기를 들자 전화를 건 사람이 또박또박 얘기했다.

“안녕하세요, 김용석 차장님. 상품기획O팀 이OO입니다. 제가 시스템에 입력하면서 실수를 해서 전화드렸어요. 죄송합니다. 상품코드 OOOOOO의 판매가능수량을 OO로 돌려 놓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난 사장님 전화를 받은거 보다 더 놀라 하마터면 일어서서 받을뻔 했다.

“이OO 대리님, 제가 방금 수정했어요. 이거 선조치 후보고인거 아시죠? 사유서를 저를 경유해서 올려야해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드려요 오후 두 시쯤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팀원들이 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후 두 시에 온단다”
“와아~”

작은 함성이 일었다. 아니 이OO MD가 뭐라고 우리가 이러는거지? 오후 두 시가 가까워올 무렵 다른 팀에서 불청객이 찾아와 약간 깽판을 치고 갔는데 시계를 보니 2시가 지나있었다. 불청객이 퇴장하자 마자 이OO MD가 칸막이 복도를 가로질러 손에 크고 검은 비닐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얼굴은 처음봤지만 걸음걸이나 표정 등을 미루어봤을때 그가 주인공 같았다. 그의 외모는 일단 평범했다. 지나쳐도 누구의 주의도 끌지 않을 평범함이었다.

“안녕하세요 차장님, 이OO입니다. 전산팀이 우리회사에서 가장 고생한다고 들었어요. 안그래도 바쁘신데 제가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그래서 제가 야근하면서 즐겨 먹는걸 좀 사왔어요. 좋아하실거에요”

막내가 잽싸게 큰 봉투를 받아들었다. 이OO MD와는 행정적인걸 잽싸게 처리하고 업무적인 얘기를 30분정도 나누었다. 솔직히 그 이상 대화를 길게 하면 위험할거 같았다. 평소 MD들에게 묻고 싶었던 프로세스와 시스템에 대한걸 물었고 그가 생각하는 개선점에 대한걸 듣고나서 대화를 마쳤다. 그는 올때와 마찬가지로 예의바른 모습으로 인사하고 돌아갔다. 그가 복도를 돌아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팀원들이 각자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다들 이땡땡, 이땡땡 하는거로군요. 명불허전이네요”
“저 분은 말 자체를 이쁘게 하네요 그러면서 할말은 다하고”
“차장님, 소개팅 나온 사람 같았어요”

“오늘 처음 알았네. 이게 바로 ‘이쁘다’라고 하는거구나”

남자여자 할거 없이 모두 그가 보여주는 부드러운 매너와 매끄러운 단어와 문장의 구성에 매료되었다. 홈쇼핑 방송의 MD는 사실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었다. 방송이 너무 늦거나 일찍 시작하기도 하고 새벽부터 그 다음날 새벽까지 온종일 달려야 하는 일도 잦다. 그래서 못난이 3총사의 짜증난 표정이 이 업계의 가장 일반적인 표정일 수 있는데 이땡땡 MD는 항상 부드러움과 매너를 잃지 않았다.

나는 직장생활 후 처음으로 이듬해 IT분야가 아닌 마케팅을 맡게되었다. 관리본부에서 영업본부로 넘어가며 영업조직의 일원이 된 것인데 여긴 특이하게도 한 달에 한 번 1박2일의, 실적을 정리하고 토론하는 워크샵이 있었다. 거기서 이OO MD의 인기를 정말 실감할 수 있었는데 식사를 할때도 주변 남자들이 서로 더 많이 챙겨주는 모습이었고 저녁회식때는 좋은 고기와 안주는 모조리 그의 앞에 가져다 놓아주었다. 좀 심하게 과장해서 말하자면 영업회의에 참가한 여성은 이OO MD와 그 외의 여자들로 나뉘는 셈이었다.

밤이 이슥해져서 마케팅팀 숙소로 돌아가는데 리조트 복도끝 소파에 검은 그림자 셋이 보였다. 가까이 지나갈때 보니 못난이 3총사였다. 그들은 자조적으로 술을 퍼마시고 있었는데 술김에 나를 불러세워 강제로 합류시켰다. 술김에 못할 얘기가 어딨겠나. 그들은 남자들에게 ‘왕재수’취급을 받고있다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OO MD에 대해서는 질투보다는 그저 자기들과 차원이 다른 존재로 받아들여 감정같은건 없단다. 셋 중 누군가 그러더라 ‘경쟁이 돼야 질투를 하지. 푸하하’ 뭐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나쁜 사람이란 사실 없다. 그날을 계기로 그들과도 친해졌다.

다음날 아침, 전날 술을 과하게 마신 이OO MD가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나타나질 않자 몇몇 남자들이 식판에 그가 먹을 음식을 담아 숙소 방앞까지 배달을 갔다. 난 전날 같이 술을 마셨던 3총사와 아침을 먹고 배달나가는 식판을 따라가보니… 기가 막히게도 이OO MD의 숙소 방문앞에 식판이 이미 4개가 쌓여있었다.
뒤에서 세 언니중 한 명이 그 모습을 보고 기가 막히다는 코웃음을 내며 한마디했다.

“나한테 저렇게 해주는 새끼 있으면 방문 열고나와 바로 데리고 들어간다!!”
“나도 나도”

난 그 해가 가기전 퇴사해 CJ로 옮겼다. 표면적으로는 오랜 경쟁사인 CJ 오쇼핑을 측면지원하는 컨설팅이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룹의 다른 계열사로도 발을 넓혔고 가끔씩 오쇼핑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CJ로 옮기고 1년도 더 지난 시점에서 3~5개월짜리 프로젝트에 들어갔는데 그 회사의 조직체계와도 연관이 있어 CJ그룹 주소록의 조직도를 보며 상품기획 조직을 들여다보던 중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으잉? 아니 이OO 대리가 언제 CJ로 넘어온거지?’ 그룹웨어의 프로필 사진을 보니 그가 분명했다. 맙소사. 여기서 또 만나다니. 반가운 마음에 자리로 전화를 걸었다. 내 생각엔 1/5정도의 확률이었지만 마침 그가 전화를 받았다.

“와~ 차장님. 그때 퇴사하시더니 CJ로 오신거였군요. 너무 반가워요. 우리 농수산 OB모임 하나 만드는거 어떨까요? 저 말고도 몇 사람 더 있어요 여기”

이 친구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프로젝트 때문에 그날 기분이 별로 안좋은 상태였는데 해독제를 맞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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