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

By | 2021-10-08

2003년 12월로 접어드는 쌀쌀한 어느 일요일이었다.  마님과 나는 결혼 3년차 맞벌이 부부로 오랜만에 마주앉아 마늘을 까고 있었다. 마늘 한 접을 모두 다듬고 믹서로 갈아 냉동마늘 블럭을 만들기 위해 작업을 한창 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마늘을  양손에 쥐고 있어 그 손으로 전화기를 잡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찌나 전화벨이 집요하게 울리는지  화가나서 전화기쪽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냥 빨리 받아~!!”

마님이 소리를 치길래 어쩔 수 없이  손을 옷에 대충 문지르고 전화기를 잡았다.

“여보세요~?”

“김용석 선생님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축하합니다~ 선생님  어쩌구 저쩌구에 당첨되셔서 뭘 받으실 수 있고 어쩌구 저쩌구~ 정말 축하드리고~ 얼레리 벌레리~”

“생각없습니다~ 탁(전화 끊는 소리)~”

마님이 물었다. “뭔 전화야?”

“응 내가 뭐에 당첨됐다길래 끊었어”

“잘했네 또 오면 받지마. 무슨 스팸 전화가 일요일에도 오냐”

우리는 또 묵묵히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2분쯤 지났을까?  다시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벨은 집요했다. 절대 끊지 않을 것 같이 말이다. 나는 화가나서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일 없다니까요~!!!  쾅~ (전화 끊는소리)”

아 근데…10초후 또 전화가 울리는게 아닌가.  약이 오를대로 오른 나는 욕이나 퍼부어줘야겠다 생각하고 다시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선생님~!!! 끊지마시고 제 얘기를 딱 1분만 들어주세요.  지난 10월에 경기도 이천 미란다 호텔에 묵으셨죠?”

“네, 그렇습니다만”

“체크인 하시면서  행운권 받으셨죠. 그리고 그거 써서 추첨함에 넣으셨구요. 주소가 서울시 강남구 뭐시기 맞으시구요”

“네 네” 이때쯤 난 전화기를 공손하게 붙들고 있었고 마님은 뭔 전화냐고 계속 나를 재촉하면서 전화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는걸 내가 계속 피헤다니고 있었다.

“네~ 선생님. 그 추첨에서 선생님이 1등에 당첨되셨습니다.  상품으로 베르나가 나갑니다~~”

수화기 저편으로 무슨 빵빠레같은게 울렸고 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왁자지껄한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렸다.  알고보니 이천 미란다 호텔에서 사람들 모아놓고 행사를 하면서 추첨을 진행한 모양이었다.  다시 전화를 준다해서 전화기를 내려놨다. 마님은 궁금해서 숨을 헐떡거렸다. 1분만 그대로 놔두면 CPR이 터질지경.

“우리가 두 달전에 미란다 호텔 여행한거 있자나? 그거 행운권 추첨에서 베르나가 당첨됐데”

“머~라고? 베르나? 자동차 베르나 말이야? 엉? 자동차가 당첨됐다고? 자동차?”

마님은 여전히 CPR이 필요해 보였지만 몇 분쯤 후 스스로 진정시키고 냉점하게 되물었다. 그거 공과금은 우리가 왕창 부담해야 하는거 아닌가? 그런 경품차는 수동에 에어컨도 달아주지 않는다더만 바로 팔아야하는거 아니야?  일요일 내내 우리끼리 시나리오를 쓰면서 애타게 후속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후속전화는 몇 시간후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김용석 선생님, 저는 현대자동차 신설동지점의 아무개라고 합니다. 아까 호텔측 전화는 받으셨죠?”

내용을 들어보니 공과금 같은거 없이 오토, 앞유리 파워윈도우, 풀오토 에어컨이 장착된 2003년형 1300cc 베르나를 받는거였다.   맙소사 살면서 이런 행운이 오다니.  차키를 받는 순간까지 믿어지지 않았다.  주변에선 행운권으로 차를 받았다고 하자 뻥치지 말라는 표정들이었다.   차를 받았으니 기념으로 어디 1박2일짜리 여행이라도 가야 하는거 아니냐고 마님한테 얘기하자 마님은 기분좋게 윤허했다.  우리는 차를 받은 다음주말 안동까지 차를 몰고 내려가서 찜닭을 먹었다.

그 베르나는 우리 부부의 행운의 상징같은 것이었다.  그 베르나를 바라볼때마다 흐뭇했고 몇 년동안이나 그 기분이 이어졌다.  이미 다른 차가 있었던 만큼 그 차는 거의 우리가족의 공용차가 되어 어머니도 사용하시고 형수님도 타면서 십 수년을 우리가족과 함께했다.  몇 년전 탈만큼 탄 그 차를 터분하려는데 둘째 동서가 나를 말렸다.  “형님 그 차는 행운의 상징인데  처분하시면 안되죠.  차라리 저희를 주세요”   운전을 막 배운 막내 처제에게 막 몰고다녀도 상관없는 차여서 혼쾌히 그 차를 처제에게 넘겼고 그 차는 지금도 폐차되지 않고 막내 동서가 잘 관리하는 중이다.  동서는 가끔 가족모임에서 그 차 얘기를 한다.  차를 받은 직후부터 사업이 잘 풀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다 행운을 물려받아서 인거 같다고.   내년까지 타면 20년인데 가족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베르나를 위한 조촐할 행사라도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P.S – 사진이 우리가 전달받았던 바로 그 베르나다.  현대자동차 영업사원이 기념으로 간직하라며 따로 보내줬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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