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밤

By | 2021-10-05

막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집전화가 울렸다. 순간적으로 나한테 온 전화라는걸 알고 두 번이 울리기전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건너편의 목소리는 승재였다. 그 자식은 이미 집이 아닌 곳에서 걸고 있는 듯 했다.

“형~ 오늘 세민씨 생일이라 파티할껀데 지금 출발하지 그래?”

막차가 끊기기전 후다닥 옷을 입고 집을 몰래 나서 이대입구에서 내렸다.  신촌역앞 Rock에 도착해보니 손님들이 꽉 차있었다.

“자아 주인공도 왔고 막차탄 승객도 도착했으니 가게 문 닫습니다~”

술집 쥔장인 호성이형이 가게문을 걸어잠궜다.  다들 단골손님이자 같은 단골 세민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자리.  친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워낙 Rock을 드나들면서 얼굴이 익어 음악 취향까지 나도 모르게 알게된 분이었다.  어쨋든 나 역시 가게가 문을 연 뒤로부터 어느 누구보다 출근 도장을 많이 찍었던 사람이라 사람들에게 다 얼굴이 알려져 있어 가게 안을 꽉채운 사람들이 나를 낯선 사람 취급하진 않았다.  아마 개개인이 모두 그런 사람인 듯 했다.  얼굴을 보면 반갑게 인사할 정도지만 정작 서로의 이름은 잘 모르는 그런 막연한 지인들이었다.  하지만 락음악 앞에선 다들 무장해제되는 특성들이 있는지라 너무나 쉽게들 어울려 놀았다.  논다는게 별게 없었다.  좋은 노래 나오면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500짜리 잔을 높에 치켜들고 흥얼거리거나 몸을 흔드는 거였다.  다들 여러 쟝르에 걸쳐 넓게 듣는 사람들이어서 이날의 신청곡들은 시간을 거듭할 수록 수준도 높았고 쟝르와 나라를 넘나들면서 절묘하게 계속 이어졌다.

늦가을에 다가가는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끔 가게문을 열고 찬바람을 쐬며 담배를 피러 나왔는데 신촌역광장엔 개미새끼 한마리 없었고 달은 텅빈 광장을 비추고 있었다.  자정이 훌쩍 넘어가자  사람들이 하나 둘 줄어들었다.  결국 한 시가 넘어갔을 때는 4~5명만 남고 다들 돌아가 그때부터는 가게안을 같이 치우기 시작했다.  생일의 주인공인 세민씨가 병을 치우면서 와줘서 고맙다고 한 마디했다.  그리고 어차피 차가 끊겨서 집에 돌아갈 수도 없으니 자기 집에 가서 차나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같은 망원동에 사는 승재 녀석의 표정을 살펴보니 이 녀석은 따라가기로 작심한 모양이었다. 난 차가 끊겨도 이대앞이나 신촌에서 망원동까지 걸어간 사례가 다반사라 집에 갈 수도 있었지만 승재녀석이 내 낌새를 파악하고 팔짱을 끼면서 같이 가자고 해서 그러마했다.  집은 아현동이라 했다.

우리 일행은 Rock을 나와 텅빈 신촌역을 거쳐 이대정문으로 이어지는 불꺼진 옷가게 골목을 지나갔다. 이대 정문앞의 제과점과 유명한 분식점인 가미분식을 지나 언덕길을 올라갔다.  한성고등학교와 추계예술학교를 거치면 아현동 사거리에서 북아현동 달동네로 오르는 약간 널찍한 길이 나오는데 그 길에서 세민씨는 익숙하게 달동네로 오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마셔없앤 술때문인지 헉헉거리기 시작했고 약간 서늘한 날씨였지만 땀을 훔치기 시작했다.  맨앞에서 걷는 세민씨는 ‘조금만 가면 돼요’를 연발하면서 드디어 좁은 골목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어디까지 올라가야 할지 모를 정도로 굽이굽이 골목길을 돌아 기억할 수도 없는 미로같은 길을 계속 올라갔다.  맨 앞의 세민씨는 영원히 멈춰설것 같지 않았다. 고요한 길을 달 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우리 다섯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적막을 갈라놓았다.  달빛과 그 그림자로 만들어진 길과 미로같은 집들의 실루엣은 다른 세계로 접어드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었다.  힘든걸 잊고 다른 세계에 온 듯한 느낌을 충분히 받았을 즈음 세민씨의 발걸음이 어느 집앞에 멈추었다.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모두 잠든줄 알았던 집엔 이미 다른 손님 서너명이 자리잡고 얘기하는 중이었다.  세민씨의 아내분도 초저녁같이 깨어 있었다.  손님이 없는 다른 방에 자리를 잡고 앉자 갑자기 세민씨가 아내를 불러 배가 고프니 밥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와 다른 손님들은 새벽 두 시에 웬 밥이냐며 극구 말렸지만 그 형수님은 괜찮다고 하시며 30분후 마당 건너편의 부억에서 한 상을 차려내왔다.  새벽 3시가 다되어 다른집에서 저녁상을 받은것도 처음이었지만 기다렸다는듯 그 모든 음식을 해치운 우리 손님들도 스스로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사실 난 그 방에 들어섰을때부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다른 손님들도 마찬가지. 보이는 벽 전체에  카세트테이프가 빽빽하게 꽃혀 있었는데 모두 공테이프에 앨범을 한 장씩 녹음한거였다. 경악할만한 수준.  이게 총 몇 개나 되는거냐고 물어보니 세어보지 않아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도 이에 대해 쉴 새없이 질문을 했는데 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앨범을 사모으면 좋겠지만 돈이 없어 지인들로 부터 앨범을 빌려와 녹음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쌓여 이렇게 된거라고 했다.  대략 방안에 가득한 테이프만 2천여개 정도. 2천여개 각자에 수록곡을 손으로 꼼꼼하게 기록하고 필요한 정보 역시 안쪽에 손으로 적어놓았는데 마치 팔만대장경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 때 밥상이 들어왔고 모두들 기다럈다는듯이 밥상을 비웠고 그러고나서 계속 그 테이프들에 대해, 그리고 음악에 대해 애기를 나누었다.  그때 나와 승재는 ‘언더월드’라는 프로그레시브 동호회지를 만들고 있었다.  새벽 네 시경이 되어 우리는 그 집을 나섰다.  여전히 깜깜한 밤이었다.

우리는 길을 기억할 수 없었지만 어쨋든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 계속해서 내려가기만 했고 예상대로 아현국민학교 건너편으로 나올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망원동까지는 또 느릿느릿가면 한 시간은 걸어야 할 거리.  신촌로터리를 지날즈음 승재가 어느길로 갈거냐고 물어왔다.

“응 오늘은 산울림 소극장 앞으로 해서 홍대정문앞 놀이터를 끼고 철길을 지나 합정역, 남경호텔로 가자”
“승재야~ 오늘은 참 이상한 밤이다 그치?”
“그러게 뭔가 홀린 느낌이야”

제일약국앞에 다다랐을 때 우린 헤어졌다. 조금있으면 해가 뜰 것 같이 세상이 밝아져오고 있었다. 승재는 여기에서 또 10분을 걸어들어가야했다.  이상하게 우리는 동이 트기 전에 집에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거기서 총총히 속력을 내려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정말 이상한 밤이었고 10년이 지나도 잊지못할 광경들이었다.

P.S
이 글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하세민씨. 그는 뮤직피플과 하모니의 편집장이었고 열정적인 음악 매니아였다. 그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 링크를 걸어둔다. “너무나 빨리 세상을 떠났던 슬픈 평론가, 하세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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