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 내가 냉면을 좋아하게 된 역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첫경험 (Early Days)

태어나서 처음 냉면을 먹고 난 울었다.  그때가 다섯살인가 여섯살이었을 거라 기억한다.  맛이있어서 울었냐고 ?  천만의 말씀
자르지 않은 면이 너무 길어서 목에 걸렸고 그때문에 켁켁대면서  입안의 면을 다시 뱉어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하품을 해도 눈물이 나오지만  그렇게 목구멍을 이미 넘어간 면을 뱉어내면 눈물이 더 많이 나온다.
그때 먹었던 냉면은 지금도 건제한 종로5가쯤에 있는 ‘곰보냉면’으로 어머니는 청계천냉면이라고 불렀고 나는 지금까지도 그런줄 알고 있다.

첫번째 체험에서 그렇게 호되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후로도 계속 냉면을 먹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다보니 나까지 자주 먹게 되었고 어느새 냉면을 좋아하는 매니아가 되어 있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 국민학교 2학년 정도가 되었을때 6학년인 형과 같이 사촌누나가 사주는 냉면을 먹으러 명동까지 나갔었다.   사촌누나는 형보다도 10살 이상이 많은 대학생이었고 명동이나 종로 등 번화가 지리는 이미 귀신같이 꿰고 있는 상태였다.  솔직히 요즘에도 홍대나 압구정동의 구석구석에 뭐가 있는지는 그정도 나이대의 언니오빠들이 대체적으로 정통하지 않은가 ?

사촌누나가 우리 형제를 데리러 집에 왔을 때 어머니가 애들이 냉면을 좋아한다고 조언을 했고 누나는 대뜸 ‘명동면옥’에 데려가야 겠다고 했다.   그 명동면옥은 명동성당으로 가는 예전 코스모스 백화점 골목 초입에 있었는데 대로변에 있지 않았고 좁은 골목으로 한번 더 들어가서 그 골목끝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누나를 따라가면서도 그 집이 허름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식당에 들어서자 일제히 입구를 향해 인사하는 20여명의 ‘가위를 든 청년들’의 기세에 일단 한번 놀랐다.  그 가위를 든 청년들은 나이트의 웨이터처럼 말쑥하게 차려입고 단지 가위만을 들고 서있었는데 그렇다고 서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서빙은 거의 비슷한 수의 언니들이 분주히 테이블 사이를 오가고 있었으니 가히 그 냉면집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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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blog.naver.com/babe311

냉면이 나오자 예의 그 가위를 든 아저씨들이 냉면을 잘라주었고 물냉면(나)과 비빔냉면(형)을 오가며 분주히 서툰 젓가락을 놀려대었다.
그 뒤로 누나와 그 집에 몇차례 더 간걸로 기억된다.  그집의 냉면이 예전 곰보냉면집보다 입에 맞았다. 

그 시절 형과 함께길을 가다가 빨간색 깃발이 내걸린걸 보았다. ‘냉면전문’…
나는 그런 깃발이 내걸린 집은 정말 냉면의 전문가로 인정받아서 정부에서 그 깃발을 하사받은 그런 집인줄 알았다.  그래서 형한테 그 집을 가르키며 저기서 냉면을 먹어보자고 했다.
형은 그래도 세상의 이치를 웬만큼 알고 있어서 그 깃발이 시장바닥에서 2-3천원이면 누구나가 살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라는 것과 깃발과 냉면맛의 상관관계는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핀잔까지 주며 얘기했다.

중딩시절 (Mid Days)

중학교시절 토요일날 학교를 파하고 집에 그냥 들어가기는 뭐해서 친구 석균이와 무작정 대흥극장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동도중학교였는데 공덕동 로터리 근처이고 서울사는 사람들도 다소 생소할만한 ‘염리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뒤로는 서울여고가 있었고 근처에 광성중고교, 수도여고 등 학교가 밀집한 동네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동도중학교에서 이대입구쪽에 있는 대흥극장을 가려면 숭문고등학교 뒷편의 골목길을 이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빨랐는데 동시상영 이전에 배를 채워야 했으므로 우리는 걸어가면서 계속 중국집과 분식집 등을 눈여겨보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요 왼쪽의 ‘을밀대’였다.  그때도 상호가 을밀대 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쨋든 최근의 가게모습도 그때와 거의 다르지 않으니 이집이 맞다고 생각된다.
진짜 썰렁하게 생긴 냉면집이라 한참을 고민하였으나 나의 거듭된 강권으로 결국 들어갔고 우리 둘은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며 국물한방울 남기지 않고 싸그리 먹어치웠다.
그 다음부터는 굳이 대흥극장에 가지 않더라도 냉면을 먹기위해 이 집을 자주 들락거렸을 정도다.   

내가 사는 집은 망원동이었기 때문에 중학교때는 버스를 타고 20분정도 거리를 등교해야했기에 고등학교를 집근처로 배정받은 후에는 을밀대에 갈일이 정말 한번도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때까지 먹어왔던 냉면들을 모두 능가할만한 최강의 냉면집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고딩,대딩시절 (Glory Days)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마자 난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아예 독서실로 모든 살림살이를 옮겨버렸다.  밥을 먹고 잡을 자는 것을 제외하면 (때때로 잠까지도) 거의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하였고 하교한 후 독서실에 갔다가 다시 밥을 먹으러 집에 가는 시간이 아까워 독서실 근처에서 밥을 사먹게 되었다.

집과 독서실은 걸어서 10분 거리였는데 독서실은 시장통에 가까웠다.  여느 재래시장이 그렇듯 시장의 중앙부에는 떡복이집과 분식집, 그리고 돼지머리고기에 소주를 한잔 할 수 있는 대포집들이 있었는데 나는 국민학생 시절부터 떡복이집의 단골이었다.
 
아마 망원동에서 오래살았던 친구들 치고 성산시장에서 파는 떡복이를 싫어하는 친구들은 찾아보기 힘들것이다.   말이 조금 삼천포로 빠지는 감이 있지만 이 떡복이야 말로 내 인생의 떡복이의 기준점이 되었고 지금도 그리운 맛이다.     망원동을 떠나 살게된지 10여년이 지나서 군대를 갔다오고 대학을 졸업한 다음 그쪽을 지날일이 있어 차를 몰고 지나가다가 문득 예전 떡복이가 생각나서 차를 돌려세우고 시장쪽으로 걸어갔다.

하도 오랜만에 와보는 시장이라 예전 재래시장이 최신식으로 바뀐것도 그날 처음봤다.  그 때문에 난 예전 그 떡복이 집이 없어졌을 거라 혀를 차면서 그래도 그 떡복이집이 있는 건물로 걸어갔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이젠 꼬부랑 할머니가 된 그 떡복이집 쥔장이 여전히 떡복이를 팔고 있었다 !!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할머니가 이미 많이 변해버린 내 얼굴을 알아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할머니의 떡복이 판과 그릇, 포크 들이 30여년전에 쓰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사실에 소름이 돋는걸 느끼며 30년전과 똑같은 맛의 떡복이를 예전과 같이 먹어치웠다.

떡복이를 다 먹고 그집앞에 있었던 분식집은 이제 없어진 걸 알게되었는데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시장이 오늘같은 모습으로 개량되기 직전 그집이 없어졌다고 했다.   바로 그 집이 고등학교때 발견한 절대 맛을 가진 냉면집이었다.

그 냉면집은 떡복이 할머니 가게 맞은 편이었는데 사실 이전까지는 맨날 떡복이로 저녁을 때우다가 밥다운 밥을 먹어보자고 생각한 끝에 무심코 들어간 집이었다.  딱 시장통의 식당다운 집이었고 간판조차 없었는데 비빔밥, 라면, 백반 따위를 팔고 있었고 그 가운데 냉면이 들어있었다.

중학교때 먹었던 을밀대 같은 냉면전문집은 기계로 면을 뽑아서  면발이 가늘고 쫄깃했던 것에 비해  냉면전문집이 아닌 곳은  보통  손으로 뜯어서 삶아내는 그런 면을 이용했다.   그 당시 가격으로 6백원 정도면 5인분을 살 수 있었고 그런면은 요즘에도 나온다.   시중에 파는 면은 부드럽고 손으로 뜯어야 하는(?) 냉면이 있는가 하면 청수냉면같이 딱딱한 면이 있었는데 부드러운 면은 30초에서 50초면 바로 끓는물에서 꺼내야 했고 청수냉면등은 4-5분을 삶아야 했다.

그 시장통냉면은 부드러운 면을 사용하였는데 가게 앞에 1인분 단위로 가지런히 면을 뜯어서 둥글게 말아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집 역시 할머니가 조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내가 냉면을 시키자 할머니는 노련한 손길로 면을 삶고 찬물에 씻어서 푸짐하게 내놓았다.   내가 첫젓가락을 입에 가져갔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정말 시장통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매콤새콤하기 이를데 없는 그 맛!!

보통 그런 업소에서는 얼음을 얼음집에서 사다가 쓰는데 그 얼음은 보통 집에서 얼린 것과 달리 크고 매우 투명한게 특징이다.  할머니는 그 얼음을 칼등으로 깨서 몇조각 넣어주곤 했는데 그 투명한 얼음이 냉면을 더욱 싱그럽고 시원하게 했던 것 같다.    아마 그 후로부터 재수시절까지 그집 냉면을 수백그릇은 먹어치웠을 것 같다.
입은 고급이었던 형도 반신반의하면서 나를 따라왔다가 눈이 휘둥그레 지면서 단숨에 먹어치우곤 했었고 주말에 집에서 시체놀이를 하다가도 그집 냉면을 먹으러가자고 하면 불타는 눈길로 나를 따라 나섰었다.

그집 할머니는 덩치도 있고 기력이 좋으셔서 그 커다란 손으로 팔팔한 젋은이의 뺨을 한대 후려친다면 자기 이름까지 까먹어버릴 정도로 정정했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를 다녀오자 놀랄만큼 쇠약해 지셨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자신의 딸과 사위로 하여금 그 식당을 운영하게 했고 지속적으로 뒤에 앉아서 트레이닝을 시키곤 했지만 가게를 비우는 날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집 사위가 해주는 냉면도 몇 그릇 맛보게 되었다.   같은 재료와 레시피건만 역시 손맛에는 차이가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 집에서 수년동안 수백그릇의 냉면을 먹어본 내가 그 맛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내가 망원동을 떠나기 직전 어느 여름날 그집에 갔었는데 그 할머니가 사위와 딸을 데리고 가게에 앉아계셨다.   형과 같이 갔었는데 할머니가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실 난 그 할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눈것은 아니었고 할머니는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단골을 알아보는 눈은 가지고 있어서 나와 형이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사위를 밀어내고 직접 냉면을 만들기 시작하셨다.
어차피 그 사위 역시 주문하는 소리를 듣지도 않고 냉면을 만들참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위손에 냉면 두다발이 들려있던걸 할머니가 빼앗아서 끓는 물에 넣은걸 내가 봤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추가적으로 한 일은 냉면 1인분을 물에 더 넣은 거였다.    그날은 정말 배가 터지도록 한그릇을 먹었고 그 맛이 역시 제대로 된 맛이었다.   그게 그 할머니가 해준 마지막 냉면이었다.

여기까지가 대학교졸업때까지의 나의 냉면 얘기였다. 
결국 어려서부터 난 냉면을 좋아했고 경험또한 풍부하다는 것을 설명하려다 보니 글이 이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의 숨겨진 내공 (Wonderous Day)

어머니의 숨겨진 냉면 제조 내공은 중학교때 만천하에 드러났다.  성산시장에서 대각선 건너편으로 성산성당에 다니고있었던 우리 가족과 다른 신자들은 거의 판자집이나 다름없는 성당을 근근히 견디고 살았다.   성당건축에는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신자들이 내는 기부금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 때문에 성당부지를 마련하고 건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못하였고 일단 부지살돈이 마련되자 부지를 먼저 샀고 건축비가 없으니 가건물이라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기금마련을 위한 바자회가 열리게 되었고 성당 부녀회와 청년 레지오 등 성당내의 모든 커뮤니티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  최종 회의에서 어머니는 ‘냉면집’을 맡게 되었다.

그때까지 어머니가 해준 냉면이래봤자 겨울철 신김치를 송송썰어 넣고 해주는 비빔냉면이 다였던 터라 (사실 이것도 대단히 맛있다) 과연 물냉면을 어떻게 만들어 낼지 나나 형이나 모두에게 관심사였다.   
어머니는 성당에서 일단 사업자금(?)을 받아 장을 볼 목록을 마련했고 건너편 성산시장에서 빠르게 물건들을 조달해 오기 시작했다.   보조를 맡은 아줌마들은 그저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가장 핵심공정은 육수를 만드는데 있었는데 그건 집에서 해야했고 커다란 들통으로 양지머리와 다른것들을 넣고 거의 하루종일 육수를 우려내고 기름을 걷어내고를 반복했었다.

나와 형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냉면을 뜯어 1인분씩 둥그렇게 말아놓는 일밖에는 없었다.   이윽고 바자회날이 되어 우리 냉면집은 떡복이 집, 비빔밥집등과 함께 바자회물건을 파는 한모퉁이에 자리잡게 되었다.   아침부터 냉면을 먹으러 오는 사람은 없는지라 나와 형이 선두타자로 냉면맛을 보게되었다.

중학생이었지만 그때까지 쌓은 내공으로도 냉면맛의 옳고 그름을 어느정도 판별했던 나로서는 시원한 육수의 맛에 놀라 성공을 나름대로 확신하고 있었다.   확실히 어머니의 육수맛은 그 어떤 냉면집의 육수와는 달랐고 가식적인 맛보다는 육수와 동치미의 시원함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는 약간 노오란 빛깔의 육수였다.  

옆집의 비빔밥이 파리를 날리고 떡복이 집 아줌마들이 자신들의 떡복이를 스스로 고통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던 그 시간, 우리 냉면집은 한마디로 인산인해였다.  사흘치 재료를 준비했던 어머니는 다시 급히 집으로 복귀를 해서 내일팔아치워야 할 육수를 지금부터 만들어야 했고 그동안에도 성산시장 야채가게 아저씨는 수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들락거리며 야채와 냉면을 쏟아냈다.   
냉면은 지나치다 싶게 많이 팔리고 있었고 성산시장의 모든 냉면은 바닥이 나버려서 할 수 없이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던 우리동네의 버들냉면 공장으로 가서 대량으로 면을 사와야 했다.
비빔밥집과 떡복이집의 아줌마들은 둘째날이 되자 자존심을 깨끗이 말아서 던져버리고 냉면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기 시작했고 사흘간의 판매결산이 끝나자 어머니의 냉면집이 성당에 최고의 수익금을 안겨주게 되었다.
성산동성당이 그 후에 훌륭하게 건축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바자회를 총괄하던 수녀님이 그 후로 이따금씩 어머니에게 바자회 냉면집을 부탁하곤 했으나  그 사흘동안 파김치가 된  어머니는 그후로 다시는 바자회에 참가하지 않으신채 가끔 집에서만  그때의 비법으로 냉면을 제조해서 우리에게 주시곤 하셨다.

지금도 가끔 어머니에게 ‘바자회에 나가지 않을거냐’하고 농담을 던지면 아직까지도 몸서리를 치시곤 한다.

냉면의 도(道)

취직을 해서 경제력이 생기고 혼자 차를 끌고 다닐 수 있게 되고 하면서 여러 냉면집을 두루두루 가본 것 같다.   가깝게는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강남 롯데 백화점 뒤에 있었던 삼봉냉면이 단골이었고 그 근처에 있는 이름도 비슷한 산봉냉면도 자주갔었다.

최근에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오장동 흥남집 냉면을 먹으러 자주가는 편이고 경기도의 옥천냉면이나 서울의 우래옥, 안세병원 사거리의 평양냉면집도 가봤었다.   비록 비슷한 부류는 아니지만 팔당댐 너머에 있는 강마을 다람쥐에서 파는 도토리 냉면이나 강원도 봉평의 현대막국수도 좋은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천그릇도 넘을 것 같은 냉면을 먹어보았고 이제 나름 냉면이란 음식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모든 도(道)는 사실 복잡하지 않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심오한 것이고 기장 심오한 것은 언제나 극히 단순하면서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다.

냉면을 말하는 사람들, 아니 음식을 말하는 사람들은 흔히 맛이 있다와 없다로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음식이야 말로 그렇게 양분법으로 맛있다, 없다로 말할 수 있는 분야인 것 같다. 냉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오래된 냉면집에 가면 옛맛을 잊지 못해서 오는 노인장들이 많은데 그들의 기준은 나와도 다르고 냉면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도 다르다.

냉면 매니아를 둘로 나누면 새콤달콤한 맛을 좇는 자들과 육수 본연의 맛을 알고있는 자들로 감히 나눌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는 ‘클래시컬한 매니아’이고 전자의 경우는 ‘혀의 느낌과 감촉을 중시하는 매니아’이다.

따라서 혀의 느낌을 중시하는 매니아들은 안세병원 사거리의 평양냉면집이나 봉평의 현대막국수, 고박사냉면, 옥천냉면, 우래옥에 가면 실패를 할 것이 분명하며 깃대봉 냉면이나 내가 고딩-대딩시절 즐겨먹었던 시장통냉면, 삼봉냉면, 오장동 흥남집이 어울릴 것이다.  보통 이들은 밋밋한 냉면을 두고 분명 ‘맛없다’라고 할것이 분명하다.

‘클래식 매니아’들의 진정한 냉면은 오히려 밋밋함에 가깝다.   이것이 그냥 시원한 냉수 한사발인지 아니면 육수인지 어려울만큼 이지랭이 같이 고소한 미세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냉면말이다.  

이 두가지 부류의 매니아들은 마치 무협지에서 한 문파내에 존재하는 두가지의 검파와 같다.  냉면을 좋아하는 것은 같지만 무엇을 중시하는 가에 대해서는 확연히 다른 측면이 있다.  어느 한쪽편을 들 생각은 없지만 확실히 냉면을 계속 먹어보면 혀로 느끼는 맛보다 그 시원한 본연의 기능쪽으로 무게가 기울어지는 내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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