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린 친구에게

By | 2019-03-07

1990년. 이제 스물 한 살에 접어든 나는 또래 애들이 그렇듯 쓸데없는 걱정(나중에 생각하니 그렇더라)으로  음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빨리 군대라도 가버리고 싶었지만 그 또한 내 맘대로 되지 않아 거의 1년 이상을 휴학한채 방황하고 있었다. 난 그 때가 내 전성기였음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친구들은 거의 다 입대해 남은 녀석들이 드물었다. 유일한 탈출구는 모뎀으로 접속해 뭔가를 풀어놓을 수 있는 동호회 게시판뿐이었다. 그 시기에 난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정말 많은 새로운 인물들을 만났지만 그럴수록 공허함도 커져갔다.

어느날부터 피박 게시판에 등장한 Osanna란 아이디를 가진 녀석의 글은 흥미로웠다. 보아하니 PC통신 초보인게 티가날 정도로 게시판 기능을 이용하는데 초짜냄새가 났지만 프로그레시브 음반들을 리뷰하는 글을 읽어보니 이쪽으론 상당한 조예가 있어보였다.  게다가 아이디 역시 이태리를 대표하는 그룹중 하나인 오산나가 아닌가.  아마도 이 녀석은 나랑 비슷한 나이지만 82년 성시완씨가 등장했을때부터 영국과 이태리쪽에 손을 대고 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난 한템포 늦게 고등학생때 전영혁씨 방송부터 듣기 시작했으니 아무래도 이 녀석보단 한 세대 늦게 진입한 터라 웬지 자존심도 상했다.

아마 그래서 서로 이것저것을 일부러 찔러봤던것 같다. 결정적으로 내가 Harmonium을 들어봤느냐고 회심의 일타를 날렸을 때 그는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면서 Dixie와 다른 수록곡에 대한 얘기를 주욱 풀어놓는게 아닌가. 그 때까지 내가 속해 있었던 UMC(움크 : 언더 매니아 클럽-주로 아트록을 들었던 연합동호회)의 멤버들외에 개인으로서 그 정도의 지식을 가진자들은 거의 없었기에 이 친구를 오프라인에서 한 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머지않아 우린 대학로에서 만났다.  나이도 같고 관심사 또한 같았기에 우린 금방 절친이 되었다. 밤엔 거의 모뎀을 옆에 끼고 피박의 두레마을 게시판에 붙어있었기에 서로의 일상에 대해서도 훤했다.

내 천리안 아이디는 Morrison으로 짐 모리슨에서 따온거였다. Osanna녀석과 함께 우리에겐 영원한 동생인 Angelo (아마 브란드와르디일 것이다) 이렇게 셋이 내 방위 복무가 끝나는 91년말쯤 천리안을 뜨기 위해 모의를 시작했다. 난 이듬해 2학기 복학때까지 9개월이 자유였고 다른 두 녀석도 상황이 비슷했다. 난 장기 아르바이트를 찾는중이었는데 다른 녀석들처럼 막노동이나 철공소, 트럭운전이 아니라 비교적 수월한 출판사의 자료정리 자리가 들어왔다. 면접을 가보니 혼자가 아니라 여러명을 찾는중이었다. 난 즉시 오산나와 안젤로를 끌어들여 우리 셋이 세트로 그 일을 책임지고 할 수 있다고 사장님께 어필했고 그게 그대로 받아들여지면서 우리 셋은 한동안 같은 일을 하면서 계획을 짤 수 있었다.

그 당시 KETEL에선 ‘케록동’이 가장 이름난 대중음악 동호회였는데 이들에겐 내분의 조짐이 있었다. 우린 일단 케텔 아이디를 하나씩 새로 만들었다. 난 Morrison으로 하려다 이미 점유당해 이태리그룹 Area의 리더인 Demetrio Stratos의 이름을 따 demitrio라고 정했고 웅규는 Zeppelin으로 하고 싶었지만 역시 점유를 당해 LedZep1으로 정했다.  웅서녀석은 Fabrizio로 셋 다 아이디를 갈아타게 되었다.

우린 동호회 기획서를 만들어 하이텔에(케텔이 명칭을 바꾼다) 접수시켰고, 그 즈음 케록동이 붕괴된다. 하이텔은 목적과 설립취지가 겹치는 동호회를 복수로 허락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 우린 내심 케록동때문에 접수가 거절될까봐 조바심을 냈었지만 케록동이 붕괴되고 이후엔 그 원칙도 완화되어 많은 동호회들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가 제출한 동호회 명칭은 ‘언더그라운드 뮤직 동호회’였다. 케록동과의 설립취지 차별화를 위한 전략이었지만 이젠 그걸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붕괴한 케록동 회원들이 우리 언더동으로 대량으로 유입되었고 곧 음악쟝르별로 소모임들이 생겨났다. 불과 1-2년 사이 언더동은 6천여명의 회원을 가진 동호회로 성장했다.

우리 셋중 LedZep1 웅규가 언제나 프론트맨이었다. 녀석이 초대 시삽을 맡았고 나와 웅서는 회원관리와 이런저런 쟝르별 소모임 활성화쪽에 주력했다. 그 때부터 몇 년간 벌어진 사건, 사고와 에피소드, 새로운 인물의 출현 등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울정도다. 언더동을 중심으로 그 때 만난 인물들과의 북적거리는 일상은 나의 90년대를 관통했다. 우리는 그 때 가장 친한 친구들을 만났고, 일생에서 가장 기억할만한 모험을 벌였으며 일생을 함께할 사랑을 만났다.

바로 어제 그때를 같이했던 친구의 영전을 마주했을 때 그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알수없는 죄책감에 휩쌓였다. 영전을 지키고있던 친구의 아내는 항상 녀석의 무용담에 등장하던 우리들을 직감적으로 알아보고 녀석이 가는길을 지켜주어 녀석도 위안이 될거라며 오히려 우리를 위안했다.

친구여~ 잘가게~ 먼저가나 남아있으나 헤어지는 상심은 마찬가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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