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By | 2007-05-26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1985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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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왼쪽의 음료병은 본문 내용과 상관없음 ^^


아마 10여년쯤 전으로 기억된다.  써클의 누군가가 소개팅을 하겠느냐고 해서 반강제로 그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이른바 007미팅이었는데  상대는 유치원 선생이었다.   그 당시 영화 광이었던 나는 때마침 주말쯤에 ‘Fargo'(코헨형제가 만든)를 볼까 생각했다가  아예 소개팅 상대하고 그 영화를 봐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나갔었다. 

상대방은 평범했고 좋은 데이트 상대였다.  어차피 서로 부담없이 만나는 처지라 애프터나 그런거에 신경쓰지 않고 그날만은 서로 재미있게 데이트 하자고 했다.   내가  Fargo를 제안했고  그녀는 혼쾌히 수락했다.   영화는 기대만큼이나 무척 좋았었다.   영화를 보기전엔 마주 앉아 차를 마셨기 때문에 조금 떨어져 있어서 눈치를 채지 못했었는데 영화를 나란히 앉아 보게 되면서 내 감각에 전달되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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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헨형제의 명작- Fargo(1996)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그건 나의 눈과 귀가 그랬었고, 나의 코는 가느다란 향기를 감지하고 이내 그 향기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처음 한시간 동안 여러가지 분석을 통해 그 향기가 오늘 만난 그 데이트 상대의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영화 중간에 속삭이듯 물어보고야 말았다.   우스웠던 것은 그 질문을 하기위해 그녀의 귓가쪽으로 다가가자 그녀 역시 뭔일인가 해서 내쪽으로 귀를 빌려주게 되었고  이미 물어보기도 전에 그 향기가 그녀의 것이라는걸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기도 뭐해서 ‘향기가 정말 좋다’고 얘기를 했고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약간 흔들고 손으로 옷을 약간 나풀거리면서 내재된 향기가 밖으로 퍼지도록  했다. 

흠~ 정말 괜찮은 향기였다.

영화를 본 후 저녁을 먹으면서 그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녀는 음식이 식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나서 대답을 해주었는데  ‘향기’가 바로 그녀의 취미였다.
그로부터 약 2시간 동안 ‘향기’에 대해서 흥미로운 질문과 대답이 오갔는데 그녀는 향수를 모으는 취미를 넘어 직접 향기를 만드는(이른바 조향) 경지에 까지 이른 고수였다.   그녀의 이론은 전적으로  옳았고  내가 아직도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날의 데이트에서 들었던 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론은 지극히 간단했다.  향기로 나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향기의 강도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데이트를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내가 향수를 처음 사게된 계기가 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향기에 주목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로 만난  내 아내를 포함해 후배들에게도 선물이 필요한 시점에서는 가장 먼저 고려하는 품목이 향수가 되었고 실제로 많은 향수를 스스로 사용했고 선물해왔다.
아내를 따라 백화점 1층을 서성거릴때는 보통 남자들은 지루하게 서서 여자들이 화장품을 고르고 계산을 치를때까지 기다리기 마련인데 나는 옆에서서 여러 향수들을 시향지에 뿌려서 그 향기들을 기억해두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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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집의 향수 컬렉션


정말 우습게도 몇년이 지나자 난 코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회사엔 여사원들이 엄청 많았고 그들 각자가 향수를 나름대로 사용하고 있었음데도 불구하고 그 강도가 사람에 따라 달랐다.   

이를테면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타도 방금 누가 타고 내렸는지를 대강 알아맞출 수 있었고 이 복도를 금방 누가 지나갔는지 향기로 알 수 있었다.    그 향기들은 그 사람의 이미지와 어울리기도 하고 그러지 않을 떄도 있었다.

7-8년전만 하더라도 나와 일을 자주 같이 하던 여사원들의 향수는 거의 알아맞출 수가 있었다.    지금은 그 향수의 이름들을 거의 잊어버린 상태다.  소홀했었으니까…  그러나 그 향기만은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역시 몇몇 사람의 향기는 확실히 기억을 한다.

수개월전 아내가 인터넷에서 책을 주문했는데 딱 두가지가 나의 주목을 끌었다.  제목이 ‘향수’라는 것과 작가가 ‘쥐스킨트’ 였다는 점이다.
나는 문학소년은 아니었지만 ‘좀머씨 이야기’를 통해 쥐스킨트의 존재감은 알고 있었다.   보통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작가와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가 아닐때가 많다.

작가가 이야기속의 주인공을 탄생시킬 때 그건 십중팔구 작가의 분신일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인공은 밋밋하기 쉽고 그림자 없는 인간과 같이 개성이 없거나 마네킹 같아 보일 때가 대부분이다.   분신이 아니라면 적어도 작가가 되고자 하는 상상속의 인물이나 현실에서 자신이 겪어본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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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

책속의 주인공이 광기에 휩싸인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좀머씨가 그런 광기에 휩쌓인 인물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웬지 작가와 끊을 수 없는 연대감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제는 흔해빠진 차량용 네비게이션 시스템은 GPS에 의존하고 있는데 내가 가고 있는 현재의 위치를 위성에서 반사하는 신호로 파악한다.   나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선 여러개의 위성을 한꺼번에 이용하게 되는데 이로써 내 위치에 대한 오차를 줄일 수 있게 된다.  보통 9개 이상의 위성을 이용한다고 한다. 

어느 작가의 위치를 파악하는것도 마찬가지인것 같다.  그의 작품은 하늘에 떠있는 인공위성과도 같고 그의 성향(위치)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첫번째 책으로 그의 위치와 성향을 파악하는 것은 오차가 크다.  두번째 책을 읽을 때부터 비로소 그의 성향에 대해 입체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되고 여러 책을 더 읽으면 읽을 수록 그가 있는 위치가 점점 확실해지게 된다.

‘향수’는 그런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쥐스킨트의 위치에 대해 어느정도 어렴풋한 감이 잡히는 두번째 책이었다.   주인공인 그르누이와 어딘가를 항상 혼자 쏘다니는 좀머씨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   항상 혼자라는 점이 그렇고  역마살이 낀것과 같이 어딘가를 정처없이 쏘다닌다는 것도 그렇다.   어두운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까지…   그의 다른 책들을 좀 더 탐독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되었다.  더 입체적으로 확인하고픈 욕망이 자꾸 든다

쥐스킨트가 주인공 그루누이를 통해 말하고 있는 ‘향기’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지만 사실 허황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것에 사실 일차적인 비중을 두어 최우선시 해왔다.   그것이 우리가 사물을 판단하는데 최우선적으로 사용하는 감각기관이라고 믿어왔고 그건 의심할 바가 없어보였다.

개는 사람에 비해 12,000배의 후각세포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모든 사물의 판단을 거의 후각에 의존한다고 하는데 그루누이가 딱 그런 사람이다.   모골이 송연한 것은 그루누이가 저지른 살인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믿어왔던 일차적 판단기준인 시각과 청각보다 후각이 더욱 파괴적이라는 점을 쥐스킨트가 그루누이를 통해 책의 초반부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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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향수' - 책에 못미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어서 망설여진다

게다가 후각은 우리가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의식적인 판단을 내리게끔 뇌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루누이는 책속에서 아무런 냄새를 가지지 않은 인간으로 나온다.   그루누이를 돌봐주던 유모들이 아기에 불과한 그루누이를 악마로 여기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건 사회통념상으로는 우스운 얘기에 불과하다.  냄새가 없는 것이 악마라는 근거는 코웃음치기에 충분한 얘기다.

그러나 책을 읽어갈 수록 그것이 설득력을 더해가고 마지막의 대반전이 충분히 수긍되는 까닭은 독자들이 쥐스킨트의 논리에 완전히 설득당했음을 의미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의 뇌는  지극히 단순하다.  사건이 납득이 되지 않고 명분이 없으며 설득당하지 않으면 뒤에 결론이나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도 여전히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고 조잡한 헐리우드 블록 버스터 한편을 본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쥐스킨트 역시 이에 대해 고심한 것 같다.  그는 주제를 산만하게 만들만한 얘기들은 모두 생략했다.  예를들어 24명을 순차적으로 살해했던 장면들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그루누이의 동기는 단 한가지 였으며 같은 이유로 모든 이들이 살해되었기 때문에 처음 한두명의 과정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해 늘어놓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 대신 그루누이가 성장기를 거치면서 그의 내면에 향기에 대한 주춧돌을 세우기 까지 골룸과 같이 오랜기간을 혼자 보낸 부분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이미 독자들은 아무 생각없이 이 부분을 읽어오면서 쥐스킨트에 이미 설득을 당한 뒤였고 마지막 그루누이의 처형장면에서는 처형을 구경하러 온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는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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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oughts on “향수

  1. 별바람

    가끔 지나쳐가는 처자들이 내뿜는 너무나 머리아픈 강렬한 향수냄새는 그 향기를 내뿜는 처자에게 달려가 한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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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사실 대부분의 처자들이 그렇지요. 가장 좋은건 약~간 집중해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은은한…그런 향일거 같습니다. 저 역시 만원인 엘리베이터를 가득채우는 지독한 향수 냄새로 질식할뻔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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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도령

    결혼전 소개팅 이야기라.. 내용이 약간 아슬아슬 하구나. 이런 위험한 이야기를 써도 되는 거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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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흠…너네집은 이정도도 허용이 안된단 말이더냐? 거의 동토의 왕국이로구나. 네 와이프를 보면 그렇게 언론통제가 심할거 같이 보이지는 않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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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효준,효재아빠

    선배가 추천해 줘서 사용했던 불가리 블랙..여전히 나에겐 그 넘이 젤 기억에 남아..향기도 기억이 나구..

    근데 애 아빠되고 나서는 걍 눈에 보인 향수가 있으면 뿌리지.최근에 향수를 산 적은 없는 것 같다..다 예전에 사 뒀던 것들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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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지금 생각해도 블랙이 괜찮은것 같더라. ^^ 그게 유니섹스 향수지. 오히려 처자들이 더 많이 쓰더라. 네 와이프는 CK 골수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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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디제이쏜다

    작가의 성향(위치) 파악하는 것을 GPS에 비유하신 부분이 참 와닿습니다. 저도 demitrio 님을 이 블로그의 여러 글들을 읽으며 조금씩 알아가고 있으니까요. 계속 느끼는 거지만 글을 차분하고 맛나게 쓰시네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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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mitrio

      감사합니다 ^^ GPS는 글을 쓰다가 순간적으로 생각이 났었는데 괜찮을것 같더군요. 그리고 제가 원래 차분하지는 않답니다. 가끔씩 차분한 모드가 연출되긴 하는데 그건 아주 가~끔 있는 일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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